사문진(沙門津)나루터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744-202 소재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북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북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통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귀신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ㅎㅎㅎ
사문진나루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으며,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달성군에서 2014년 “사문진 주막촌 복원과 함께
다양한 수변 레저·휴식 공간을 조성해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이
옛 나루의 향수를 느낄 수 있고, 역사·문화와 레포츠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명품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오고 있다...
화원동산(花園東山) 표지석 & 유래
화원동산 안내도
주막촌(酒村)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 촬영지
1932년 9월 14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로
당시 핍박받던 농촌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으나,
나루터의 뱃사공이 철도 부설과 철교 건설에 대립하다 패배하고 죽어가는
숙명적인 설정은 일제의 침략과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가는 우리 민족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사문진 나루터 역사 안내문
천하대장군 & 지하여장군
수령 500년이 넘은 팽나무
국내 최초 피아노 유입지(1901년 5월)
당시 사람들은 나무통 안에서 소리가 난다고 '귀신통"이라고 했단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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