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들

숙종임금의 잠행

자즐보 2014. 12. 18. 15:25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재위:1674~1720년)의 암행(暗行)에 관한 일화는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잠행일화1,,,

어느 날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자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암행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고래등 같은 어느 관료의 집에 다가가 보았는데, 인적이 끊어지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 했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면서 손주와 이야기하고 있고,

할머니는 짚을 고르며 거들어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이 만들다가 놓은 망태기가 한편에 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으며,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띤 얼굴로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 듯 한 움막에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사해 본 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어 보았다.

 

주인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 아니요.

어떻게 이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잠행일화2,,,

숙종이 수원성 고개 아래쪽 냇가(현,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었다.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묏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그렇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가서 물어 보았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저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지관이신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처음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 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찾아 와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웬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둘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에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 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은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낯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히 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 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께서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 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 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라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기가 죽은 선비에게 이젠 당당하게 반말까지 하는 갈처사,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보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 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 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 본 것이었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대왕의 왕릉이 지금 서울 서북쪽의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갈처사는 노자로 30냥만 받아 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일화다.

 잠행일화3,,,

숙종이 미행을 하기 위해 왕궁을 나와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선가 울음소리와 장구 소리가 나며 노래하는 소리가 나는 집이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왕이 그 집으로 들어가 보니,

한 할머니는 울고 있고, 여중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남자는 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지나가는 과객인데,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들어왔으니 사연이나 알려 주시요.라고 했더니,

장구를 치던 젊은 남자가 하는 말이, 오늘이 우리 어머니 생신인데,

무얼 해 드리고 싶어도 집에 가진 것이 없어서 걱정하던 차에 저희 집사람이 머리를 깎아

달비를 팔아 생신 음식을 해드렸소.

그리고 아내는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꼬깔을 쓰고 춤을 추고,

저는 아내의 춤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장구를 치고 있던 거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저희 살림 형편을 아시니 생신을 차린 우리 부부가 기특하기는 해도

머리를 깎은 며느리가 안스러워 울고 계신 거랍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숙종 임금이 이렇게 효도를 행하는 집안이 없다고 생각하고

젊은이에게 자네 글을 좀 읽었나? 하고 물으니,

젊은이가, 생활이 곤궁하여 겨우 사서를 조금 읽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내가 한양에 다녀오는 길인데, 모래 별과가 있다고 하니 응시해 보라고 하고는

급히 성으로 돌아 가서, 신하들에게 별시를 보도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어명에 영문을 알지 못하는 신하들이 서둘러 과거를 준비하였다.

젊은이가 한양으로 올라와 보니 정말 별시를 본다는 방이 붙어 있어 이에 응시하였다.

별과에 제시된 문제는... 

"한 노파는 울고, 젊은 여중은 춤을 추고, 사내는 장구치며 노래한다" 였다.

젊은이는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므로 곧 글을 써서 바치었으나,

다른 응시자들은 문제의 뜻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급제는 당연히 젊은이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왕 앞에 나가 사은숙배를 드리자,

왕이 그의 효행을 칭찬하며 좋은 벼슬자리를 제수하여,

젊은이는 어머니를 잘 모시고 아내를 부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잠행일화4,,,

숙종 임금이 어느날 밤이 되어 평민복을 하고 한양의 뒷골목을 가고 있는데

시골 농부 차림의 사람이 짐을 지고 먼 곳에서 걸어 온 것처럼 쩔뚝거리며 걸어 오고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가서 어디서 오는 길손이냐고 물었더니, 삼수(三水)에서 임금님을 만나보러 왔다고 하였다. 삼수에는 들죽이 맛이 좋아서 진상으로 올리려고 하는데, 당최 임금님이 어디 계시는지 몰라서

이렇게 헤매고 있다고 했다. 

 
숙종은 그 사람을 데리고 서울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주다가 한 밤이 되어 숙소를 잡아 주면서, 

다음날 경복궁 대문 앞에 서 있으면 임금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일러주고, 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그 사람이 경복궁 대문에서 서 있으려니 사모를 쓴 사람이 나와 그를 궁으로 안내하였다.

임금님을 만난 그 사람은 절을 올리고 가지고 온 들죽을 진상으로 올리며 보니

임금님은 다름 아닌 어제 만난 평민이었던 것이었다. 숙종은 그 사람의 정성에 감복하여,

고향 마을에 벼슬자리를 주고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는 일화이다.

 

 

 

  잠행일화5,,,

어느날 남산골 생원 이서우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창 너머에서 방바닥으로 뭔가 '툭'하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열어 보니 그릇 가득 약밥이

담겨 있었다.

 

'웬 약밥일까? 어느 분인지 참으로 고마운 분이구나' 하며 이생원은 약밥으로 배를 채우고

기운을 차린 뒤 밤새워 공부를 했다.

 

이듬해 이서우는 마침내 문과에 급제해 숙종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어느 보름날 밤

숙종은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 해 전 어느 날 밤, 짐이 암행을 나갔지. 남산골에 이르렀을 때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힘없이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네. 그 선비가 너무 기운이 없는 듯하여 별감을 시켜 약밥 한 그릇을 넣어

주었는데 지금 그 선비는 어찌 되었을꼬?"

 

이때 곁에 있던 이서우가 갑자기 숙종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이 은혜를 어이 갚아야 할지요. 그 선비가 바로 소신이옵니다.

그 약밥 속에는 마제은(은으로 만든 말굽)도 들어 있었는데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간직해 오고 있습니다."

이서우는 눈물을 흘리며 품 안에서 마제은을 꺼내 왕에게 바쳤다.

 

숙종은 크게 놀라고 기뼈하며 이서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잠행일화6,,,

어느날 밤 숙종이 미행을 나갔다. 밤이 깊은데 어디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와

소리를 쫒아가 보니 어느 오막살이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창사이로 안을 엿보니 젊은 남편은 글을 읽고, 새댁은 등잔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젊은 선비 내외의 모습은 비록 가난하지만 귀엽고 흐뭇해 보였다.

얼마쯤지나 젊은 남편은 책을 덮으며 속이 출출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새댁이 조용히 일어나 벽장 속에서 주발 뚜껑에 담은 송편 두개를 꺼내 놓으며 드시라고 한다.

남편은 반가와 하며 얼른 한개를 집어 먹더니 두개째 집어들었다.

그러자 임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시장하기는 마찬가지일텐데 어찌 혼자서 두개를 다 먹나하며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남편이 송편 하나를 입에 물고 새댁의 입에 넣어 주는데 서로 사양하며 즐기는 것이었다.

숙종은 부부의 애정을 부러워하며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인을 불러 송편이 먹고 싶다고 하자 수라간이 온통 난리를 치루며

큰 수라상이 들어 오고, 큰 푼주에 송편을 높다랗게 올려 전후좌우의 옹위를 받으며

요란스레 들고오지 않는가.  눈 앞에 아른거리던 어제밤의 아름다운 광경은 깨어져 버리고

울컥 화가 치민 왕은 "송편 한 푼주를 먹으라니, 내가 돼지야"하면서 송편 그릇을 내동뎅이 쳤다.

모두 왕의 심정을 알리 없어 의아해 할 뿐이었다. 그 후 내막을 알게 되고

"푼주의 송편이 주발 뚜껑 송편의 맛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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