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문경시

구수재 & 상강정

자즐보 2014. 9. 7. 23:31

 

 

 

구수재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 소재

 

평산신씨 한천처사공 종중(平山申氏 寒泉處士公 宗中)

 

 

한천처사 신숙빈선생 유적비

寒泉處士 申叔彬先生 遺蹟碑

 

 

한천처사 신숙빈선생 유적비

공의 휘는 숙빈이요 호는 한천처사로 고려개국 원훈이신 태사 장절공 휘 숭겸의 십칠세 손이시다. 

증조고이신 휘 안 은 고려의 종부사령이셨고 정선의 칠현사에 배향되셨으며

조고이신 휘 개 는 좌의정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셨고, 시호는 문희이시니 바로 오문의 파조이시다.

 

고이신 휘 자승은 문과에 급제한 대사성 이셨고 의산위의 따님인 정부인 의령남씨와의 사이에서

1457년(세조 3)에 탄생하셨으니 태종대왕의 삼녀이신 정선공주의 외손이시기도하다.

 

공께서 주부,사헌부감찰을거쳐 거창현감으로 재직시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심에 관직을 버리시고 빙장인 사직 안귀손공과 더불어 이곳 소양의 양지에 복거 하시며

상강정을 짓고 후학에 열중하심에 향방의 후진들과 원근의 사우들이 듣고

찾아오는사람이 많았으니 공께서 더욱 겸손하셔서 사도로서 자처하시지 않으시고

자세히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시지 않으셨다.

 

일찍이 공께서 자신의 뜻을 표하셨으니 다음의 유시가 전한다.

유산유수처   무영무욕신   경전소백일   채약송청춘

산과물이 어울어진 이곳에와 욕심을 버린 몸이 영리를 바랄건가

맑은 날 논밭 갈아 농사를 짓고 젊은시절을  약초캐며 보냈다.

이후 중종임금이 등극하여 수차레 벼슬을 권하였으나 그때마다 불취하시고 고사하시니

지개가 한결같으셨다.  공께서 1520년(중종 15.임진)에 사세하시니 향년 64세이셨고

영수을 굽어보는 소양 구수동 연소혈 자좌오향원에 배위이신 순흥안씨와 쌍분으로 모셔졌으며,

공의 오세손 석번이 행장을 찬하였고,  한천서원에 배향되셨다. 

한천서원은 최초 소양리사를 숙종초에 창건하여 사직 안귀손공, 한천처사공을 봉안하고

1697년에 가항한천으로 옮겨 한천향현사로 개칭하여 추담 성만징선생을 추배했으나

조정의 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어 1946년 한천단을 설단하고 1984년 개수하여

매년 삼문중(평산신, 순흥안, 창녕성)에서 제향한다.

특히 한천서원의 편액은 문희공의 17세손인 해공 익희의 친필로서 현재까지 보존되어

전하고 있고 종중의 선산인 가항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상강정에서는 1929년 우균과 후손 현국을 중심으로 각 지파의 원로들이

집안에 전하는 여러자료를 토대로 공의 조부이신 문희공의 실전된 문집인 인재집을 편집하고

간행한 유서깊은 곳이다.  이 문집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목판본이 보관되어 전하고 있다.


공의 형님이신 군수공 휘 숙권께서 명화공을 낳으시고 명화공은 사임당을 낳으시니

공께서는 사임당의 종조부이시다.

최근에는 아드님이신 율곡 이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모자지간에 고액권 화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어 영광이 배가되었으며 영원한 현모양처의 표상이니 가문의 훈육이

어디에 비하겠는가.   


최근 한국주요민속자료 제 254호로 지정된 평산신씨묘출토복식은 400여 년간 이어온

독특한 외손봉사의 전통과 16세기 문경일대의 향촌사를 조명할 중요한 자료로서 인정된 바

그 묘의 주인공은 바로 공의 사남이신 병절교위 휘 세보의 딸이고

장수인 황지와 혼인한 정현으로서 공의 손녀이시다.


상강정내의 강릉최씨 열부각은 중종대에 전곡리에 세워졌다가 1946년 도로 확장공사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강릉최씨는 판부사 치운의 따님이시며 문성공 안유의 현손인 사직 안귀손공의 처이며

한천처사공의 빙모이시다. 남편이 먼저 운명하시자 다음과 같은 슬픈 시를 지어

제사지내고 자진하니 그 곧은 열녀의 행실을 나라에서 칭송하고 정려를 내렸다(전,동국여지승람)

봉황우비  화명락지  봉과 황이 함께 날아 화답하니 즐거웠도다. 

봉비불래  황독곡지  봉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으니 황만 홀로 우는구나.

수문천  천묵묵지  머리를 긁적이며 하늘에 물어봐도 대답이 없네.

천장해활  한무극지 하늘은 크고 바다는 넓어 이한은 끝이 없구나.


세월의 풍파에 공을 기리는 여러 유적이 훼손되고 관리가 부실함에 이를 복원하려는

후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로 유적성역화사업이 수년간 지속되었고,

마침내 건국60주년에 맞추어 그 결실을 맻었으니 참으로 감개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근처에 세워진 유허비는 경상북도의 도비를 지원받고 많은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으며

강릉최씨 정려각의 단청공사는 문경시의 예산이 지원되었다.

 

구수재의 조경에 사용된 자연석은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농암 청화산에서 채취하여

그의미를 더했으며 이곳 구수재내 다섯 개의 대형 자연석은 태사장절공, 종부시령공,

문희공,  대사성공,  한천처사공 등 다섯 조상님의 혼유석을 의미하고

영령들의 휴식을 위한 후손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할수 있다.


공께서는 이곳 문경 평산신씨의 입향조이시며 후손들은 정계, 관계, 학계, 경제계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숭고하신 뜻을 이어받아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공의 높고 귀한 그뜻은 변함이 없어라.

이곳의 산세가 우뚝하고 영수의 수기는 맑고 깨끗하니 공께서 끼친 유풍은

영원히 전하여지고 후손들은 만대에 무궁번창 하리라.


학식이 박약하고 미족하여 유적비문의 기록을 사양하다가 공의 묘비문을 찬한

십일세손 삼화종중의 휘 방노 의 뜻을 계승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한천처사공종중의 중지를 모아

여러 사실을 있는그대로 감히그리고 공손히 기술합니다.


무자년  사  십 일

삼화종중 십구세손  동옥근지

한천처사공종중 도유사 십육세손 탁균.

문희공종중도유사겸 

한천처사공 유적성역화사업 추진위원장 십팔세손 봉식.

 

 

 

 

 

 

 

 

 

 

 

 

 

 

 

상강정(上江亭)

상강정은 가은읍 전곡리 마을 소양서원과 영류정을 지나

산자락에 위치하며, 평산인(平山人) 신숙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1890년에 중수하였으나, 1996년에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서 지었다.

 

상강정은 전면에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도로변의 높은 단애(斷崖)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툇간 앞면 기둥 하부에는 하층 기둥을 세웠으며,

전면의 툇간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

 

 

 

정자의 오른쪽 전면에는 최씨 정려각이 있다.

 

 

 

신숙빈(申淑彬)

신씨가 문경 가은에 정착한 것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1498년 연산 무오사화 때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당세(當世)에 고명(高名)하던 학자 한천처사 신숙빈이 벼슬을 버리고 고개를 넘어 문경 가은에 오면서부터이다. 이후 중종이 여러 번 공(公)을 조정으로 청하였으나, “내가 대대로 큰 벼슬한 명문으로 혼조(昏朝)를 만나서 어진 이들을 죽여 없애던 날에 능히 한마디 말로 바르게 구해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성명(聖明)을 만나서 도리어 사명(思命)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죄이다” 하며 고사하였다.

신숙빈은 자손 다섯을 두어 후손들이 전곡리․민지리․농암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계(契)가 농암 가실목(加項)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며 자손들을 가항파(加項派)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의사의 묘(금산, 칠백의총)에 묻힌 좌승지 경일(慶一)의 셋째 아들 탁(鐸)으로부터 계속 14대까지 종손으로 이어져 14대 종갓(재선)집에 이르고 있다.

신숙빈의 후손 중에 농암 가실목(현 농암초등학교 터)에서 묘소를 정할 때였다. 지관이 두 명당을 추천하였는데 한 장소는 “여기에 묘소를 정하면 자손들이 만석지기로 부자가 될 것이요” 다른 장소는 “이후 8대손 후손에서 혈식군자(혈식천추 도덕군자 血食千秋 道德君子: 선도 문화가 꽃피던 고조선시대 이후로 도덕군자가 되고자 뜻을 세운 이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영원토록 그 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한 군자)들이 추앙하는 인물이 배출되나 집안의 자손이 귀하게 되며, 집안의 부는 가난이 극에 달할 것이다”고 하였다. 선택은 부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여 후자 쪽을 택하였다.

이후 정말로 자손은 독자만 나오든지 아니면 양자를 들여야 하였다. 또 집에 불이 나 가옥이 전소되고 소 10여 마리가 불타는 등 재난이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자손 8대에 거의 이르러(약 6대) 그 명당이 성묘가 힘들다고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른들은 이장을 하지 못하도록 부랴부랴 묘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산 밑에 다다랐을 때 개장을 하여 묘소 위치에서 흰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과연 기운이 하늘로 솟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명당이거늘 생각이 부족한 너희들로 말미암아 애석한 일이 되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옛 영화는 찾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자손도 번창하고 가문도 일으키면서 평산 신씨 가문의 정신은 뚜렷이 계승하여 매사 하는 일은 주위 표본이 되고 마을의 중심이 되어 내려왔다.

 

한천처사 신숙빈 시(寒泉處士 申淑彬 詩)

유산유수처(有山有水處) 산도 있고 물도 있는 곳에      

무영무욕신(無榮無辱身)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내 몸일세

경전소백일(耕田消白日) 밭 갈며 하루 해를 보내고

채약송청춘(採藥送靑春) 약초 캐며 청춘을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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