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안보

파독 광부와 간호사

자즐보 2014. 2. 17. 13:46

 

 

 

파독 광부와 간호사

 

1960년대에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지향정책은 농촌 붕괴현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막대한 실업과 외화 부족현상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국정부는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추진했다.

 

반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다. 많은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파독 광부

광부의 파견은 1963년 12월 16일 한국정부의 임시고용계획에 관한 한국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협정에 따르면 한국 광부의 파견조치는 “한국 광부의 탄광지식을

향상시켜 한국 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의 광부인력 부족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미국이 독일에게 요청했던 한국 재건지원의 약속 이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고자 했던 독일정부의 의도와 실업난과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인력수출을 원했던 한국정부의 이해가 부합되어 이루어진 조치였다.

 

1963년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한 상태였다. 3년 계약의 파독광부들에게는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높은 수입이 보장되었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로 가기를 희망했으며, 1963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정부에서 독일(서독)에 파견한 광부는 총7,900여 명 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광산 노동의 경험이 없던 초심자였기에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파독 간호사

1960년대 한국은 심각한 실업난과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외화부족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반면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다. 특히 간병인과 같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간호 인력의 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정확한 의미에서 간호 인력의 독일 송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송출은 기독교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간교류의 형식이었다.

이후 1966년부터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대규모 간호사 파견이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한국해외개발공사가 간호 인력의 모집과 송출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만 226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에 파견되었다.

 

파독간호사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외화는 한국 경제개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따라서 최근 이들의 국가발전에 대한 공헌에 대해 정부차원에서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당시 대한중석사장 故박태준의 글              

(1964년 박대통령 서독방문시)

  
1964년 12월10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으로 출발했다.
朴대통령과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한 차에 타고,
육영수 여사는 뤼브케 대통령 부인과 바로 뒤차에 탔다.
양국 정상을 태운 차량행렬과 경호차량은 거의 반 마일 이상 이어졌다.

오전 10시40분, 朴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탄 차가 탄광회사
본관 앞에 도착했다. 朴대통령 내외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은 양복 정장, 간호사들은 색동 저고리를 입고
입구 좌우에 줄을 서서 朴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산의 악대가 주악을 울리는 가운데
朴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광부, 간호사들과 손을 잡았다.

『근무 중 이상 무!』, 『각하, 안녕하십니까!』

광부들 대부분이 軍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광부들은 군기가 잔뜩 든 군인들 처럼 거수경례를 하며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朴대통령도 거수경례로 그들의 인사에 답하고,
악수를 나눴다.

朴대통령보다 10m쯤 뒤떨어져서 걷던 陸여사는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넸다.
『가족들에게서는 연락이 잘 옵니까』
『일은 고달프지 않습니까』 
陸여사가 『고향이…』 하고 묻자 간호사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가 돼서 간호사, 광부 할 것 없이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하던 광산 악대도 꺽꺽거리며 울었다.
벌써 행사장인 강당 중간쯤에 가 있던 朴대통령은
뒤를 돌아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陸여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주저앉으려 했다.
주위에서 간신히 陸여사를 부축했다.
 
朴대통령을 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던
기자들은 이 광경을 취재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진을 찍던 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려 놓고 함께 울었다.
취재기자들도 주저앉아 통곡했다.
독일인 광산회사 사장도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10분 이상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朴대통령 내외는 단상에 올랐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는
뒤로 갈수록 제대로 이어지지를 못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가 후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합창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 소절인 『대한 사람 대한으로』에 이르러서는
가사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함보른 광산회사 테드 호르스트 영업부장이 환영사를 읽었다.
그는 『한 나라 국가원수가 이곳을 찾아 준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1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광부들의 근면함과 규율을 칭찬했다.
그의 차분한 환영사로 식장의 분위기가 겨우 진정됐다.
 
다음은 朴대통령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푼 다음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읽던 원고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흐느낌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朴대통령은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전했다. 30분 예정으로 함보른 광산에 들렀지만,
강당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朴대통령은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朴대통령 일행은 광부들 숙소를 돌아 봤다.
우리 광부들의 얼굴과 팔·다리 등에는 상처투성이였다.
채탄 작업 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은 상처들이었다.
『지하 1000m 아래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나서 갱 위로 올라와
한잔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얘기를 朴대통령은 들었다.

광부 대표 유계천씨는 『이국 땅에서 대통령 내외분을 뵈니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면서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독일에 남아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朴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떠나려는데 한국인 광부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朴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朴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차 안의 朴대통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울지 마세요』라며 朴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본의 숙소에 도착한 朴대통령 내외는 한국일보의
정광모기자를 방으로 불렀다.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鄭기자가 『울지 마세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울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대통령 내외를 위로했다.

그러자 朴대통령 내외는 鄭기자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참만에 눈물을 그친 朴대통령은 鄭기자에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기왕에 정해진 동남아 순방만 마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이 밥술깨나
들게 될 때까지는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어야겠다』 

통역관으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前 중앙대 교수.
9·10代 국회의원)씨는 『그때 朴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당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자헌 前 체신부 장관은 함보른 광산에서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1964년 12월11일자 朝鮮日報 1면에 쓴 기사의 제목은
『「後孫 위해 繁榮의 터전을」
 - 모두 눈물 적시며 感激(감격)의 한때』였다.

『눈물바다였어요. 간호사들이 陸여사를 붙들고 울고,
陸여사가 통곡을 했어요.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일은 내 인생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만9000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파송됐다. 수십 對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광부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광부였던 정광모씨는당시 독일에 간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소수였고, 공과대학 등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첫 번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잘해야
앞으로도 계속 광부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을 이력서 위조해서 광부라고 내보냈다고 했다.

1962년 10월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의 借款(차관)은 바로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억90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독일에 돈을 벌러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은 적지 않았다.

광부 출신 在獨교포들 모임의 이름은 「글뤽 아우프」,
우리 말로 「무사히 위로 올라가세요」이다.
 
이곳에서 발간한 「派獨 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작업 중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고 한다.
 
6.25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
우리도 잘 살아보자, 잘 살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는 염원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힘겨운 노동을 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이 분들의 희생을
우리 젊은 세대들은 알고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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