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안보

한국군 월남파병

자즐보 2014. 2. 17. 15:23

 

 

한국군 월남파병

 배경

베트남 전쟁의 시작은 1945년 호치민[胡志明] 정권과 프랑스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은 전쟁이 치열해진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의 여론이나 정세, 국내의 반전여론에 부딪쳐 군대의 대규모 파병이 어렵게 되자

우방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하여 세계의 여론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끌면서 미국의 손실을 축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국에도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자유우방의 지원을 상기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지원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경과  

 최초의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군대 철수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주재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데

합의하고,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한국군 파병은 8여 년 동안 총 34만 여 명이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의의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당은 파병에 대해 반대했고, 1966년 추가파병시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측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맹호·청룡 부대의 파병만으로도 미국이나 자유세계에 대한 신의를 다한 것이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빼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세계 여론이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에서 한국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더이상의 파병이 있을 때는 한국에 뚜렷한 국가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국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군사기술 및 군장비 등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근대사 & 안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미정상 공동기자회견  (0) 2014.04.27
군계급  (0) 2014.03.29
파독 광부와 간호사  (0) 2014.02.17
역대 대통령 선거 벽보  (0) 2014.01.11
구한말 평양풍경  (0) 201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