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興仁之門,보물 제1호)
서울 성곽의 동쪽 문. 일명 동대문이다.
숭례문과 함께 서울 성곽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되었고, 단종 1년(1453)에 보수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869년(고종 6)에 새로 축성하여 현재의 모습이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 우진각지붕으로,조선 초기의 양식인 숭례문과는 다르게 흥인지문의 누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석축 역시 숭례문에 비하면 보다 실전적이며, 반달형의 옹성을 가지고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임진왜란의 교훈이 반영된 듯...
세 글자로 되어 있지만(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홍지문, 동소문 등) 특이하게
이 흥인지문만 네 글자로 되어있다. 이는 고종 재위 때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그 기운을 북돋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넉 자로 지었던 것이다.
동대문 바로 옆에 있던 개천(청계천의 옛 이름)이 흘러나가는 곳 이름이
오간수문, 혹은 오간수구인 것도 같은 이치이다.
동대문구 관할이었으나, 1975년 동대문구 관할이었던 숭인동, 창신동(흥인지문 바깥 지역)
일대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동대문 역시 종로구 관할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나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문화재 당국에서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 흥인지문을 2호로 지정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광복 이후 1962년 우리 정부에서 문화재 보호체계를 만들고 국보와 보물을 지정할 때
일본 관리체계를 벤치마킹하면서 굳어진 듯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듯.
조선말기의 흥인지문
현재의 흥인지문
돈의문(敦義門)
한양의 2차 성곽공사가 마무리 될때 지어진 8개의 성문중
하나로 세워졌으며, 서대문이라고 한다.
1413년 태종 13년에 돈의문을 폐쇄했다.
이유인즉태종시대의 대표적 권신이던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근처에 있었는데
당연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수레가 오가자 시끄럽다라는 이유로
돈의문을 막아버린것이다. 이리되자 사람들은 이숙번의 집을 지날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 해댔다고 한다.
새로 길을 내고 대문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길이 이숙번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이숙번은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길내고 대문을 만들자라고 하여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결국 이숙번이 몰락하고 1422년, 세종 4년에 서전문을 철거한 뒤
세월이 오래되어 성문과 성루가 낡게되자 1711년, 숙종 37년에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 다시 지으면서 새문, 신문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래서
구한말에 정동에 세워진 새문안교회가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굳어지게 된다.
일제는 경성을 재개발하겠다며 그 과정에서 전철 복선화를 추진했는데
전철을 복선화하려면 돈의문이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일제는 편리하게
돈의문을 철거하고 전철을 복선화 했다.
각종 지명에만 남아있었을뿐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있는지
관심을 안가졌다는 점에서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일제가 철거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을 것이란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는 단층 누각이라는 특징이 있다.
복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끝에 서울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현재 돈의문 복원사업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서대문이라는 이명(異名) 때문에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중구 정동의 현재의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자리가 돈의문 터였다.
다만 중구 정동을 비롯한 중구 서쪽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된 곳이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존재했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 돈의문
돈의문 현판
숭례문(崇禮門,국보 제1호)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 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현재 서울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건축물로 남대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한성의 정문에는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기준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서(西):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남(南):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북(北): 지(智)를 기르는 흥지문이어야 하지만
지혜를 뜻하는 지(智) 대신에 정(靖)자를 썼는데 이는 "꾀하다"
또는 "꾀" 라는 뜻이 있다. 지혜 대신 살짝 비틀어 꾀라고 지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신(信)은 보신각으로 4대문의 중앙에 세웠다.
한양 도성도 철거되기 시작하였으며,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 역시
헐리게 되었고 해방 이후 50년이 넘도록 복원되지 않았다.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될 수 있었다.
1층 누각을 받치는 석반만 남긴 채 모두 전소되는 비운을 당했다.
그 후 숭례문 복원공사가 추진되어 2013년 5월 복원을 하였으나
각종 부실공사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1904년 숭례문 모습
2008년 방화로 전소되기 전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불타는 숭례문
2013년 5월 복원된 숭례문
숙정문(肅靖門)
숙정문 또는 숙청문(肅淸門)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으로도 부른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에 있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울 4대문과 보신각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대응하는데,
유독 이 문의 이름은 지(智)를 사용하지 않고 꾀를 의미하는 정(靖)자 또는
음기를 정화한다는 의미로 청(淸)자를 넣어 지어졌다. 일설로는 백성들이
똑똑해져서 부려먹기 힘들어지는걸 방지하는 차원이었다고...
이중 먼저 쓰인 이름은 숙청문인데,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와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청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바뀐것으로 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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