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김씨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 안동김씨〉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방경(方慶)이다.
‘구 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 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 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 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 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 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 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구(九)가 있다. 구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만 2645가구에
42만 5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 안동김씨〉 흔히 ‘신 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 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 안동’의 시조 선평(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상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儷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
병시(炳始), 호위대장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州)·병덕(炳德)·
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 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신 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5068가구에 4만 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태사의 유래
신라 말엽 당시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하였다.
927년(경애왕 4년) 포악한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 동수싸움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갔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안동을 공격하여 왔다.
10년전 공산싸움에서 패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생사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1월 예안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후백제군은 맞은 편의 석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대상(大相) 홍유 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당시의 고창(안동의 옛이름)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과 지방호족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돌아가신 경애왕의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무도한 견훤으로 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분 태사는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때를 맞추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진격하니 견훤은 견디지 못하고 8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30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하여 100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 병산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세 분 태사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선평은 대광(大匡),
행과 길은 대상(大相)을 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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