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문화·유적지

영호루(映湖樓)

자즐보 2013. 11. 27. 10:22

 

 

 

 

영호루(映湖樓)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의 대수(大水)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년 동안 안도의 관문으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鄕土愛) 짙은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 남편

강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老松)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鶴駕山)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시가지를 에워싼 영남산(映南山) 줄기는 철따라 색깔이 변하니,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은 온통 시가의 모습을 다르게 한다. 일찍이 우탁(禹倬),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 했거늘, 다시 복원된 이 곳 누각에 올라,

눈아래 비단을 펼친듯한 대하(大河)와 경관을 바라보면, 그 누가 속세(俗世)의 시름을 잊지 않으리...

 

 

 

<공민왕 어필>

“영남에서 맘껏 놀며
여러 해를 보냈건만
이 곳 산과 물을 더 좋아 하네.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터엔
나그네 갈길이 나뉘어졌고
푸른버들 휘늘어진 둑밑에
흩어져 있는 촌락

고요한 바람 거울같은 물위에
눈썹같이 그려진 연기
오랜 세월 흘러간 담머리엔
이끼가 자랐구나.

비그친 들판에서 격양가가

                                      들리는데
                                   앉아서 보노라

                                 나무 끝 삭정이에
                                  물 오르는 것을”


 

 

<영호루에 걸려 있는 우탁선생의 시액>

윗글은 역동(易東)우탁(禹倬)선생이 영호루(映湖樓)에서 읊은 한시(漢詩)로 지금부터 약 600여년 전 영호루의 경관(景觀)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위로는 임금을 비롯해서 아래로 초동(樵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누각(樓閣)은 세월과 더불어 유실과 중건(重建)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초석(礎石)과 석주(石柱)만이 옛 영광(榮光)을 간직한 채 유수와 풍우에 마멸되고 있다.
안동교를 건너기 전 서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는 영호루 옛터는 앞면 주춧돌과 돌기둥은 물에 잠기고 뒷면의 것은 모래가 덮혀 일부만 모래둑에 흩어져 지금은 옛일을 알리 없는 부녀자들의 빨래터가 되어 있다.
영호루가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알수가 없으나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초기(高麗初期)의 건축물임을 짐작할 수 있고, 이 누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는 고려초 공민왕(恭愍王) 때이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몽고 군사에 쫓긴 홍건적(紅巾賊)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등이 서경을 수복하고 홍건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또 다시 홍건적의 무리 10만이 침입하자 이성계(李成桂)등이 나가 싸웠으나 12월에 경성(개성)이 함락되고 왕은 이천(利川), 충주(忠州)를 거쳐 조령(鳥嶺)을 넘어 12월에 안동(福州牧)에 당도했다. 왕은 직무실로 복주관아(福州官衙) 이용하였으나 홍건적을 격파하기 위하여 자주 영호루에 거동하여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렸으니 1362년(공민왕 11년)1월 정세운(鄭世雲), 안우 등이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경성을 수복하였다. 복주목민들의 충성심과 홍건적 토벌의 본영이 된 영호루는 왕의 심기를 일변케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니 경성이 수복되어도 왕은 계속 안동에 머무르면서 4월에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친필로 “安東雄府(안동웅부)” 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다.
1363년(공민왕 12년) 3월 왕이 경성에 돌아간 후에도 영호루를 잊지 못하다가 1366년(공민왕 15년)에 친히 필연(筆硯)을 잡고 누의 현판으로 「映湖樓」 석 자를 써서 누에달게 하니 고을 수령 신자전(申子展), 고을인 권사복(權思復) 등은 누가 작아 금빛으로 새긴 현액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확장 중수(擴張 重修) 했다.
그 후 600년간 많은 선비가 영호루를 찾게 되자 현액은 누각을 채우고 시를 읊고 독서하는 소리는 끊임없이 낙동강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간 누의 연혁(沿革)은 순탄하지 않아 1547년(명종 2) 홍수로 유실되고 현판만 전해 오다가 1552년(명종 7) 안동부사 안한준(安漢俊)이 중건하였고, 1707년(숙종33년)에 다시 유실된 것을 당시 안동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했으며, 1934년 대홍수로 유실되고는 현판만 전해 오다가 1970년 11월 현위치인 안동시 정하동에 철근 콘크리이트로 한식누각(韓式樓閣)을 중건하였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인데 이 곳 북면에 공민왕 친필 현판이 「映湖樓」가 걸려 있어 옛 유지(遺址)를 건너다 보고 있다.

<참고문헌:영가지(永嘉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 영호루(映湖樓)  

 

 

 

일찍이 우탁, 정도전, 정몽주, 권근, 김종직, 이황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하여 시를 남겼다.

영호루에는 김방경, 역동 우탁,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점필재 김종직,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등 명현 석학들의 제영(題詠)과 시판이 줄지어 게판되어 있어 영남을 대표하는 정자임을 느낄 수 있다.

 

 

▼ 공민왕의 친필 안동웅부와 영호루 현판, 포은 정몽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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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회와 퇴계 이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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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映湖樓) 이황(李滉)이 지은 시이다.

客中愁思雨中多

?値秋風意轉加

獨自上樓還盡日

但能有酒便忘家

慇懃喚友將歸燕

寂寞含情向晩花

一曲淸歌響林木

此心焉得似枯槎

 

나그네 시름이 비 만나 더한데

 

더구나 가을 바람에 더욱 심란하구나.

 

홀로 누에 올랐다 해 져야 돌아옴이여

 

다만 술잔 들어 집 그리움 잊는다.

 

은근히 벗을 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쓸쓸히 정을 품고 늦은 꽃을 향하구나.

 

한 곡조 맑은 노래 숲 속을 울리는데

 

이 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같이 되었나

 

 

 

▼ 유여회: 본명 유수(柳綏), 자 여회(汝懷), 유수영정병함 (柳綏影幀幷函) 보물 1176호

 

 

▼ 농암 이현보와 삼봉 정도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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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충열공 김방경 장군과 점필재 김종직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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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보

 

詠福州映湖樓詩(영복주영호루시)

- 복주 영호루에서 읊다.

 

 

山水無非舊眼靑(산수무비구안청)

- 산천은 예보던 그대로 이고

 

樓臺亦是少年情(누대역시소년정)

- 누대엔 역시 어린시절이 남아있네.

 

可憐故國遺風在(가련고국유풍재)

- 아, 나라엔 옛 풍습이 남아 있어서

收拾絃歌慰我行(수습현가위아행)

- 악기와 노래로서 내 가는길 위로하네.

 

 

점필재 김종직의 시

 

지는 해 발과 깃발에 맑은 기운 하 많은데 / 落日簾旌灝氣多

누에 기대니 오만 시름 어지러이 교차하네 / 倚樓愁思亂交加

구불구불 가을 호수는 은하수에 통하고 / 逶迤湖水秋通漢

삐걱삐걱 땔나무 수레는 밤에 집을 향하네 / 轂轆柴車夜向家

광채는 물가의 반짝이는 편액에서 쏴비추고 / 光射汀洲星斗額

향기는 숲속의 혜초 난초 꽃에서 나누나 / 香生林薄蕙蘭花

밝은 달 아래 전조의 일 다시 생각하노니 / 月明更想前朝事

황새 두루미만이 풀어진 떼배에서 우짖을 뿐. / 惟有鶖鶬叫斷槎

 

 


▼ 찬성사 김흔(김방경의 차남), 양촌 권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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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7권

안동영호루시(安東映湖樓詩)의 운을 차한다.

 

 

객지에 누대에 오르니 감탄이 많고 / 客裏登樓感歎多

게을리 노니 귀 밑에 흰 털이 더할 뿐 / 倦遊嬴得鬢絲加

바닷가에 떠돌면서 부질없이 서울을 그리고 / 海天流落空懷國

고향에 돌아와도 집이 없는 것을 / 鄕郡歸來未有家

푸른 기와에 바람이 이니 소름이 돋고 / 碧瓦凌風膚起栗

금 글씨에 햇빛 비치니 눈이 부시네 / 金書照日眼迷花

긴 내가 멀리 은하수와 닿았으니 / 長川逈與銀河接

곧 배 띄우고 멀리 가고 싶네 / 直欲迢迢泛一槎

 

 

▼ 대봉 양희심, 호연 이집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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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은 이인복, 역동 우탁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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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복[李仁復,1308(충렬왕 34)~1374(공민왕) 23(고려말의 문신, )

 

우탁 [禹倬,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고려 후기의 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역동선생(易東先生)

 

<탄로가(歎老歌)>한손에 막대 잡고 - 우탁의 다른 시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 신제 주세붕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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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717호
명     칭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소수서원
관 리 자 소수서원

     

일제시대 우편엽서의 영호루(20세기 안동의모습 안동시.예총 안동지부발행)

 

 

▲ 갑술년 수해시 영호루 잔해<20세기 안동의모습 안동시.예총 안동지부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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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영호루(映湖樓)----김흔(金忻)

 十年前遊入夢淸 (십년전유입몽청)

重來物色慰人情 (중래물색위인정)

壁間奉繼嚴君筆 (벽간봉계엄군필)

堪陀愚我萬戶行 (감타우아만호행)

 

십년전 노든 일이 꿈결 같은데

모든 풍물 다시 보니 기꺼웁구나

벽위에 높이 걸린 아버님 글월

어린 몸 벼슬 길이 죄송하여라.

*김흔: 金方慶의 아들(3584년~3642년)

 

 

영호루(映湖樓)-----우탁(禹倬)

 嶺南遊蕩閱年多 (영남유탕열년다)

最愛湖山景氣佳 (최애호산경기가)

芳草渡頭分客路 (방초도두분객로)

綠楊堤畔有農家 (녹양제반유농가)

風恬鏡面橫煙黛 (풍념경면횡연대)

歲久牆頭長土花 (세구장두장토화)

雨歇四郊歌擊壤 (우헐사교가격양)

坐看林漲寒 (좌간임초창한사)

여기서 놀아낸지 여러 해 되오

물은 맑고 산은 고아 경치 좋아서

이리 저리 갈리운길 방초 새로 뻗어있고

버드나무 느러 선곳 농갓집들 놓여 있네

안개는 살쩍인양 거울속에 어른대고

담장이 오래 되니 버섯들이 돋아난다

비가 들어 나무숲 어우러지고

여기 저기 들에서는 풍년가 차오

 

*우탁: 고려 충렬왕때 사람으로 주역(周易)을 외어서 호(號)를 역동(易東)이라함 벼슬이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이르다

성리학(性理學)을 통(通)함.(3388년~3435년)

 

 

 

 

 

안동 영호루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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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扁額)’ 에 대한 상식

 

‘편액(扁額)’ 설암체 바탕 석봉이 재창조

 


 '이마에 걸린 넓적한 판'의 뜻을 지닌 편액(扁額)은 현판의 한 종류다. 현판에는 '광화문'처럼 건물이나 대문 이름을 쓴 편액이 있는가 하면, 건물을 세운 의의와 경과를 적은 상량문이나 감상 목적의 주련이 있다. 이밖에도 제명기·게시문·좌목 등이 있다.

 

 현판의 종류 또한 궁(宮), 궐(闕), 전(殿), 각(閣), 합(閤), 당(堂), 방(房)이나 이에 딸린 문(門) 등 건물의 성격·종류·위치 등에 따라 다양하다.


 현존 자료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 편액은 고려 말 공민왕 필적으로 전해지는 '安東雄府(안동웅부)' '映湖樓(영호루)'다. 그리고 궁중 편액으로 필자가 알려진 대표적인 것은 조선 초 양녕대군이 쓴 '崇禮門(숭례문)', 성임의 필적인 창경궁의 '弘化門(홍화문)', 중기 이황이 쓴 '興仁之門(흥인지문)'이나 조희일의 '敦義門(돈의문)', 이신이 쓴 경희궁의 '興化門(흥화문)' 등 서울의 4대문과 5대궁 정문의 필적이 있다.


 이들 궁중편액의 조형적 특징을 보면 조선 초기·중기는 물론 후기·말기에까지 굵은 획과 빈틈없는 짜임새 면에서 편액글씨의 일관된 공통점이 포착된다. 이러한 대자해서, 즉 편액글씨의 특징은 여백의 공간이 필획보다 큰 소자나 중자 글씨와는 반대되는 현상이다.


 편액글씨의 서체 연원은 고려 말에 전해진 원나라 승려 설암의 '춘종첩(春種帖)' '병위삼첩(兵衛森帖)' '동명(東銘)' 등의 글씨와 관계가 깊다. 그 이유는 설암체가 조선초기부터 당시 송설체나 왕희지체와 더불어 대자(大字) 글씨 공부의 모범으로 왕실에서 널리 인출하여 종친과 육조, 집현전 관리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졌기 때문이다.


 한석봉의 '대자천자문'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 설암체의 신수를 그대로 체득하여 조선화시킨 것인데, 안진경과 황산곡 필법이 설암체의 모태가 되면서 세로로 긴 자형에다 규각(圭角)과 파임이 강조된 점획의 골격이 된 것이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영호루(映湖樓)의 시판(詩板) - 원문(原文)과 해석(解釋)

 


*김방경(金方慶) 시


題福州映湖樓

山水無非舊眼靑

 

樓臺亦是少年情

 

可憐故國遺風在

 

收拾鉉歌慰我行

 

 

(收拾鉉歌慰我情)

 

진흥원 자료의 我情→我行임을 바로 잡습니다. 南齋

 

산수는 모두 구면이라 반갑고
누대(樓臺)마저 우뚝히 예대로일세.
기특타, 고국 풍류 전해오노니
노래 불러 이 마음 달래어 보자.

김방경(金方慶) 1212 ~ 1300
고려 후기의 명장,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안동(安東), 관직은 평장사(平章事). 위의 시의 원제(原題)는 동정일본과차복주등영호루(東征日本過次福州登映湖樓)임.

 

 

 

*김흔(金昕) 시


映湖樓

十載前遊入夢淸
重來物色慰人情
壁間奉繼嚴君筆
堪咤愚我萬戶行


영호루

꿈길 속에 흘러간 십 년 세월
당시 풍물 다시 보니 반가웁고나.
벽 위에 아로새긴 아버님
6) 글월
어린 몸 벼슬 길이 죄스럽습니다.

김흔(金忻) 1251 ~ 1309
고려 후기의 장군. 방경의 子. 관은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

  

*홍간(洪侃) 시


映湖樓

草長江南三月天
永嘉山水好風烟
文章太守謝康樂
珠翠佳人玉井蓮

영호루

풀빛 짙은 강남땅 삼월에
영가 고을 산천마다 안개꽃 피었네.
원님 문장은 사영운
7) 못지 않고
비취색 미인들 우물속 연꽃이어라.

홍간(洪侃) ? - 1304
고려 말기의 문신. 시인, 자는 평포(平浦),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厓), 본관은 풍산(豊山), 관은 첨의사인(僉議舍人).

 

*우탁(禹倬) 시


映湖樓

嶺南遊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風恬鏡面橫烟黛
歲久墻頭長土花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杪漲寒槎

영호루

영남에서 호탕하게 여러 해 놀았건만
영호의 좋은 경치 가장 사랑하였네.
방초 짙은 나루터엔 나그넷길 나뉘고
푸른 버들 우거진 언덕 농가가 있네.
바람 잔 수면에 안개 비끼니
해 묵은 담장머리 이끼도 무성해라.
비 개인 들판에서 들리는 격양가
8)
수풀 끝엔 차가운 삭정이가 자라네.

우탁(禹倬) 1263 ~ 1343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천장(天章), 호는 역동(易東), 시호는 문희(文僖), 본관은 단양(丹陽), 관직은 성균제주(成均祭酒).

  

*채홍철(蔡洪哲) 시


映湖樓

海山當日往來多
物外精神到此加
初謂夢遊雲雨峽
漸疑身入晝圖家
南江秋夜千峯月
北里春風萬樹花
雖是無情閒道者
登臨不得似古槎

영호루

바다로 산으로 많이도 다녔지만
속진(俗塵)을 떨친 정신 예 오니 더하네.
처음엔 꿈 속에 운우협
9)을 놀더니
점차 그림 속 신선이 되어가네.
남강의 가을밤엔 봉우리마다 달이요
북쪽 마을 봄바람엔 나무마다 꽃이로고.
한가로이 길 가는 무정한 나그네도
이 누에 오르니 흥 아니 날 수 없네.

채홍철(蔡洪哲) 1262 ~1340
고려 말기의 문신.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中菴), 본관은 평강(平康), 관은 정승(政丞).

 

 

 

 

 

*신천(辛蕆) 시

映湖樓

此樓佳致說無多
摘勝探奇莫我加
百里桑陰藏野店
四山松翠護官家
江頭雨暗連天草
巷口燃濃出屋花
只解登臨如黙黙
詩人沒彩也如槎

영호루

이 누의 좋은 경치 말해서 무엇하랴
나보다 더 명승(名勝)을 탐하는 이 있는가?
뽕나무 숲에는 술집도 있고
푸르른 소나무 관가를 둘렀네.
강가에 비 개니 하늘에 닿은 풀빛
연기 짙은 마을 어귀 담장 위로 솟은 꽃.
만약에 누에 올라 한 수 읊지 못한다면
시인으로 광채 없음 삭정이와 다르랴?

신천(辛蕆) ? ~ 1339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호는 덕재(德齋), 본관은 영산(靈山), 관직은 판일직사사(判密直司事).

 

 

 

 

 

 

 

*정자후(鄭子厚) 시


映湖樓

起樓詩眼費功多
月斧雲斤亦未加
自訝登臨橫翠閣
誰敎飛上太淸家
春江綠漲葡萄酒
夕照紅酣躑躅花
待過已知軒蓋近
樹頭時有鵲槎槎

영호루

누를 세운 시적(詩的) 안목 들인 공도 많구나.
달도끼 구름날인들 예서 무얼 더하랴.
천상(天上)의 횡취각
10)에 온 것 같으니
뉘가 나로 하여금 태청가
11)에 오르게 했나?
봄 강물 푸르름이 포도주처럼 불어나고
저녁 별 붉은 기운 철쭉꽃에 무르익네.
돌아가길 기다리는 헌개 이미 왔는가?
나무 위의 까치가 때때로 우짖으니.

정자후(鄭子厚)
고려 충숙왕 때의 복주 목사(福州牧使).

 

 

 

 

 

*조간(趙簡) 시

映湖樓

此樓風景惱人多
八詠雙溪不敢加
旗蓋影交樵牧路
管絃聲落吏民家
跨空簷豁膚生粟
照水軒危眼眩花
玉斧修成廣寒殿
飄然不訝上仙槎

영호루

영호루 좋은 풍경 사람을 뇌쇄(惱殺)하니
쌍계팔영(雙溪八詠)인들 예보다 더 나으랴?
오가는 사람들 길 가득 분분하고
관아며 집집마다 관현(管絃) 소리 드높아라.
덩그렇게 높은 처마 몸이 오싹 떨리는데
물에 비친 난간 보니 눈 앞이 아찔하네.
옥도끼로 다듬어서 광한전
12)을 지은 듯
표연히 신선의 뗏목에 오름 같네.

조간(趙簡)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시호는 문량(文良), 본관은 김제(金堤). 관은 찬성사(贊成事).

 
 
 
 
 
 
 
 
 

 

*정포(鄭誧) 시


映湖樓

鞍馬怱怱閱數州
夕陽携水更登樓
謫來未厭湖山好
事去空驚歲月遒
半壁殘燈孤館夜
傍簷疎樹故園秋
欲知別後相思意
天際長江袞袞流

영호루

말을 타고 총총히 몇 고을 지나
석양에 벗과 더불어 다시 누에 올라라.
귀양은 왔을지언정
13) 산수(山水)를 좋아 하노니
일은 지나가고 세월의 빠름에 새삼 놀라라.
희미한 등잔불만 외로운 여관의 밤
처마 곁 성근 나무 고향이 생각나네.
이별한 후 그리는 맘 알고 싶거든
님이여! 저 하늘가 은하수를 보소서.

정포(鄭誧) 1309 ~1345
고려 충혜왕 때의 문신, 자는 중부(仲浮),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 관직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권사복(權思復) 시

映湖樓

到處樓臺摘勝多
此樓贏得賞心加
蒹葭岸外西南路
桑枯村中數四家
三字御書金照水
一區仙境錦添花
早年攀折江邊柳
老倒歸來尙來槎

영호루

도처에 누대 있고 절승도 많지만
이 누에 오르니 더욱 맘이 끌리네.
갈대 핀 언덕 너머 서남으로 나뉜 길
뽕나무 우거진 마을 두서너 농가.
세 글자 어필(御筆)이 금빛으로 어리니
금상첨화일세, 한 갈피 선경이여!
어릴제 꺾고 놀던 강변의 버들
늙어서 와 보니 아직도 그대롤세.

권사복(權思復)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관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 시


映湖樓

花山客半月
今日向他州
縱有重來約
那堪惜別愁
船開芳草渡
酒盡夕陽樓
行役何時了
風塵滿馬頭

영호루

보름 동안 화산에서 머물던 나그네
오늘 다른 고을로 떠나려니
비록 다시 찾아온다 약속했건만
이별의 근심 가눌 길 없어라.
고운 풀 제치고 배타고 건너는데
해 저문 누대에는 술통이 비었구나.
언제쯤 마치려나, 나그네길을
바람과 먼지가 말 앞에 일어나도다.

이집(李集) 1314 -1387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관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광주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전록생(田祿生) 시


映湖樓

北望景華疊峯多
樓高客恨轉承加
仲宣作賦非吾土
江令思歸未到家
楊柳自搖愁裏縷
辛夷初發亂餘花
若爲江水變春酒
一洗胸中滓與槎

영호루

북으로 서울 보니 첩첩 산봉들
누 높아 객의 한은 더욱 더하네.
고향을 생각하며 중선
14)은 부를 썼고
못 가는 집 그리워 강령은 슬퍼했네.
시름겨이 실가지를 흔드는 버들아
난리 뒤 처음으로 꽃 핀 개나리야
만약에 이 강물이 모두 다 술이라면
가슴 속 쌓인 시름 말끔히 씻으련만.

전록생(田祿生) 1318 ~1375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호는 야은(野隱), 자는 맹경(孟耕). 본관은 담양(潭陽), 관은 제주사록(濟州司祿).

 

 

 

 

 

*정몽주(鄭夢周) 시


安東映湖樓回自日本作

閱遍東南郡縣多
映嘉形勝覺尤加
邑居最得山川勢
人物紛然將相家
場圃歲功饒菽粟
樓臺春夢繞鸎花
直須酩酊終今夕
萬里初回海上槎

일본서 돌아와 안동 영호루에서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녔지만
영가의 경치가 제일 아름다워라.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
인물도 많아라, 장상가가 분분하네.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
누대의 봄날엔 꾀꼬리와 꽃이 있네.
모름지기 오늘 밤이 다 새도록 취하리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배를 타고 왔잖은가?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고려 말기의 충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 관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정도전(鄭道傳) 시


映湖樓

飛龍在天弄明珠
遙落永嘉湖上樓
夜賞不須勤秉燭
神光萬丈射汀洲

영호루

나는 용 하늘에서
희롱턴 구슬
멀리 영가 고을
영호루에 떨어졌네.
밤에 구경할 때
촛불 켤 일 없네
신기한 광채가
물가를 쏘니.

정도전(鄭道傳) ? ~1398
조선 개국공신.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 관은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권근(權近) 시


映湖樓詩

客裏登臨感歎多
倦遊贏得鬢絲加
海天流落空懷國
鄕郡歸來未有家
百尺危欄浮碧落
九重宸翰耀金花
長川逈與銀河接
直欲迢迢一泛槎

영호루시

나그네로 누에 오르니 감회도 많아라
이리저리 떠돌다 몸만 늙었네.
바다 밖을 헤맬 때는 고국이 그리웠는데
고향이라 돌아와도 내 집도 없구나.
아스라이 높은 난간 빈 공중에 떠 있고
임금님의 내린 글씨 금빛으로 찬란해라.
긴 내가 멀리 은하와 접했으니
곧 바로 아득히 배 한 번 띄우고파.

권근(權近) 1352 ~1409
조선 초기의 명신.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安東). 관은 대제학(大堤學).

 

 

 

 

 

*이원(李原) 시


映湖樓

今年又作嶺南遊
行遍南州到福州
地僻堪誇人尙儉
亭閒不覺客凝眸
山川豈爲興亡改
風月應隨左右收
半日登臨胸次盪
欲歸未去重淹留

영호루

금년에도 또 영남으로 유람길 떠나
남쪽 고을 두루 거쳐 복주에 왔네.
땅이 궁벽하니 사람들은 검소하고
정자가 한가하니 구경하기 좋아라.
산천이 어찌 흥망 따라 바뀌랴
풍월이야 어디서나 마음대로 거두지만.
한나절 누에 있으니 가슴마저 시원하여
돌아가야겠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네.

이원(李原) 1368 ~1429
이조 세종 때의 문신.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시호는 양헌(襄憲), 본관은 고성(固城). 관은 좌의정(左議政).

 

 

 

 

 

*류방선(柳方善) 시


映湖樓

吾生漂泊遠遊多
今上高樓興轉加
千里一身長去國
七年萬死又離家
倚欄最恨醒臨水
落帽誰期醉採花
坐瞰蒼波殊有味
何須怪怪學浮槎

영호루

내 평생 표표히 유람 많이 하였지만
오늘 누에 오르니 흥 더욱 나는구나.
천리 밖 외로운 몸 기나긴 귀양살이
칠 년간 죽을 고생 또 집을 떠나네
15).
난간에 의지하여 술 깰까 한하노니
뉘 더불어 모자 벗고 취한 채 꽃 딸꼬?
앉은 채 강물 보니 더욱 운치 있으니
무엇하러 이상하게 배 띄우고 구경하리.

류방선(柳方善) 1388 ~ 1443
조선 세종 때의 학자.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본관은 서산(瑞山). 시와 문장이 매우 뛰어남.

 

 

 

 

 

 

 

*조효문(曺孝門) 시

映湖樓

嶺南佳麗已無多
形勝花山百倍加
芳草晴川分客路
綠楊脩竹掩人家
湖心日暖魚吹浪
墻角風微燕蹴花
南北奔馳何日了
瀛洲直欲問張槎

영호루

영남의 좋은 경치 이미 많지 않은데
지형이며 경치야 화산
16)이 제일이지.
꽃다운 풀 맑은 내에 나그네길 나뉘고
푸른 버들 긴 대는 인가를 가렸네.
호숫물 따뜻하니 물고기 뛰고
바람 잔 담모서리엔 제비가 나네.
남북으로 바쁜 걸음 언제 그치랴
영주
17)에서 장건
18)의 뗏목을 묻고 싶구나.

조효문(曺孝門) ? ~1462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자는 행원(行源, 시호는 (成度), 본관은 창녕(昌寧), 관은 예조참판.

 

 

 

 

 

 

 

 

 

 

 

*최수(崔脩) 시


映湖樓板上韻

春晩江樓景氣多
詩人情興向來加
一城桃李潘安縣
兩岸園池習氏家
牧隱新文珠泣月
陽村麗句筆生花
南巡往事何須問
老樹潮侵臥作槎

영호루 현판 위의 운을 빌어

늦은 봄 강루엔 경치도 좋아
시인의 흥취가 더욱 더하네.
도리화 핀 고을이 반안현
19) 같고
양 언덕 동산과 못 습씨집
20) 같네.
목은의 문장은 구슬이 달에 우는 듯
양촌의 고운 글귀 붓에서 꽃이 피네.
남순
21)하던 옛 일을 물어서 무엇하리
늙은 나무 물에 잠겨 뗏목이 되었구나.

최수(崔脩) ? ~ ?
조선시대의 문신

 

 

 

 

 

 

*이석형(李石亨) 시


映湖樓

水光山色上樓多
雨過斜陽景更加
一路高低禪客院
自烟朝暮野人家
幸生昭代尋芳草
爲向前朝問落花
還使此身生羽翰
直看雲漢掛雲槎

영호루

물 빛 산 색은 누에 오르니 더 짙고
비 지난 저녁 볕에 경치 더욱 좋구나.
한 쪽 길엔 높고 낮게 선객원
22) 있고
흰 연기 아침 저녁 야인가
23)에 오르네.
다행히 소대
24)에 태어나 방초
25)를 찾고
전조(고려)를 향하여 낙화
26)를 물어보네.
돌이켜 이 몸이 날개가 돋힌다면
곧바로 은하수에 뗏목을 띄우리라.

이석형(李石亨) 1415 ~1477
조선 세조 때의 명신. 자는 백옥(伯玉), 호는 화헌(樗軒),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연안(延安). 관은 도체찰사(都體察使).

 

 

 

 

 

*김종직(金宗直) 시


映湖樓

落日簾旌灝氣多
倚樓愁思亂交加
透迤湖水秋通漢
轂轆柴車夜向家
光射汀洲星斗額
香生林簿蕙蘭花
月明更想前朝事
惟有鶖鶬呌斷槎

영호루

지는 해 쓸쓸한 기운 발에 어리어
누에 오른 이 마음 시름도 많아라.
출렁이는 물결은 은한(銀漢)에 닿고
덜컹대는 수레는 집을 향하네.
모래톱을 비추는 북두의 별빛,
들에서 스며 오는 혜란화 향기.
달 밝은 밤 고려의 흥망을 다시 생각해 보니
재두루미 우는 소리 간장을 끊네.

김종직(金宗直) 1431 ~1492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선산(善山). 관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 높음.

 

 

 

 

 

*조순(趙舜) 시


映湖樓

客裏淸遊到此多
上樓情興晩尤加
晴川芳草東西路
綠竹垂楊遠近家
三字御書留寶額
一林風雨落餘花
傍人莫作尋常看
我是南來亦泛槎

영호루

나그네로 예 와서 놀던 때가 많았는데
늙어서 다시 오니 흥 더욱 나는구나.
맑은 내 꽃다운 풀 속 동서로 길이 있고
푸른 대 수양버들 원근에 집이 있네.
임금이 내린 글씨 현액(懸額) 속에 머무는데
한 줄기 비바람에 남은 꽃마저 지네.
벗이여! 이 일을 예사로이 보지 마오
이 몸 역시 남쪽에서 배를 타고 왔노라.

조순(趙舜) ? ~ ?
조선 시대의 문신. 본관은 함안(咸安), 관은 참판(參判).

 

 

 

 

 

*양희지(楊熙止) 시


映湖樓

昨夜雨來江水多
映湖春色十分加
高低細路二三寺
掩映長林千百家
金字籠紗雲隱月
玉山欹帽眼生花
樓頭華到中流半
何用窮河泛古槎

영호루

어젯밤 내린 비에 강물이 불어
영호루의 봄빛이 더욱 짙었네.
높고 낮은 오솔길 두서너 가람
누를 가린 긴 숲 너머 수많은 인가.
금글씨 비단에 싸이고 달은 구름에 숨는데
취한 채 바라보니 눈에는 꽃이 피네.
누대머리 좋은 경치 물 가운데 어리는데
어찌하여 강물 위에 배를 뛰우리.

양희지(楊熙止) 1439 ~1504
조선 성종 때의 문장가. 자는 가행(可行), 정부(禎父), 호는 대봉(大峰), 본관은 중화(中和). 관은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이현보(李賢輔) 시


次映湖樓

落魄登樓歲月多
重來非分印章加
黌堂負笈留遺蹟
驛里居停有主家
白首東西身已老
靑山今古眼添花
長林遠樹渾依舊
三十年來半作槎

영호루에 차운하여

낙백하여
27) 누에 오르던 세월도 많았는데
분에 넘는 벼슬 받고
28) 다시 또 왔네
글 배우던 향교엔 옛 자취가 남아 있고
집 떠나 머물던 주인집도 그대로네
동서로 분주하다 몸은 이미 늙었지만
청산은 예 같아 눈에는 꽃이 피네.
긴 숲 멀리 흐릿하게 뵈는 옛 나무들
삽십 년 동안 반은 삭정이가 됐네.

이현보(李賢輔) 1467 ~1555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비중(棐中), 호는 농암(聾岩), 시호는 효절(孝節), 본관은 영천(永川). 관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김안국(金安國) 시


映湖樓

湖山歲晩客懷多
牽晩風流興轉加
落日鳴鐘何處寺
淡烟疎雨幾人家
歌催郢雪飄餘曲
笛弄江梅落後花
醉倚欄干頻送日
小船漁火繫枯槎

영호루

호산(湖山)에 해(歲) 저무니 나그네의 회포 많은데
늦게 즐긴 풍류가 흥취 더욱 더하여라.
저녁에 우는 종 어느 절인고
흰 연기 성긴 빗 속 인가가 보이네.
노래는 영설
29)의 표여곡을 재촉하고
피리는 강가 매화에 앉은 눈(雪)을 희롱한다.
취한 채 난간에서 먼 곳을 보니
작은 배 고기잡이불 뗏목에 반짝이네.

김안국(金安國) 1478 ~1543
조선 중종 때의 명신.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성(義城). 관은 대제학(大堤學).

 

 

 

 

 

*권응인(權應仁) 시


映湖樓

南州奇勝此偏多
綠樹陰濃景特加
淸磬出林鳴野寺
淡烟橫浦起漁家
半邊殘照披雲葉
一陣輕風疊浪花
江上晩凉堪濯熱
弄波鷗渚擬浮槎

영호루

남쪽 고을 명승이 여기에 다 몰렸나
푸른 나무 그늘 짙어 보기 더욱 좋은 걸.
맑은 종소리 숲속 절에서 울려 오고
맑은 연기 비낀 포구 속 하나 둘 어가(漁家).
반변천(半邊川) 석양은 구름 조각 헤치고
한 무리 바람결에 꽃물결이 겹쳐 이네.
강물 위 서늘함이 무더위를 씻어내고
물결을 희롱하는 갈매기 물에 뜬 뗏목 같구나.

권응인(權應仁) 1517 ~ 1588
조선 중종 때의 문인.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안동(安東), 관은 한리학관(漢吏學官).

 

 

 

 

 

*권응정(權應挺) 시


映湖樓

嶺外江山著眼多
映湖樓勝倍增加
龍蛇筆力超三昧
烟火居民足萬家
魚戲鏡中飜雪浪
鷗眼沙畔隔蘆花
憑欄北望思千里
身世還同泛水槎

영호루

영남의 산천이 눈 가는 곳 많아도
영호루 아름다움 훨씬 더 낫네.
공민왕 붓글씨는 용틀임하고
밥 짓고 사는 백성 일만 집은 되겠구나.
고기 노는 물 속엔 눈 같은 물결 번득이고
백구 잠든 언덕이 갈꽃에 가려 있다.
난간에 기대어 북쪽 천 리 그리노니
이 내 신세 물에 뜬 뗏목과 같구나.

권응정(權應挺) 1498 ~ 1564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사우(士遇), 호는 묵암(黙菴), 본관은 안동(安東). 관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사룡(鄭士龍) 시


映湖樓船

平生不上映湖船
遙和新篇意未圓
創巧草亭安彩鷁
展開秋練落晴天
笙歌引興淸宵永
風月撩懷繡句傳
許住三年官便滿
遊人長憶去侯仙

영호루선에서

내 평생 영호선(船) 못 타 보아서
글 한 편 지으려니 잘 되질 않네.
잘 꾸민 초정(草亭)엔 채색한 익수(鷁首)
30) 편안하고
펼쳐진 가을 하늘 물 속에 떨어졌네.
생황(笙簧)노래 흥 일어 밤 깊도록 노는데
풍월에 회포 실어 고운 시구 읊조리네.
삼 년을 지내면 고을살이도 끝나니
노니는 사람으로 제후도 버린 신선을 기억하리.

정사룡(鄭士龍) 1491 ~ 1570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본관은 동래(東萊). 관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이황(李滉) 시


映湖樓

客中愁思雨中多
况値秋風意轉加
獨自上樓還盡日
但能有酒便忘家
慇懃喚友將歸燕
寂寞含情向晩花
一曲淸歌響林木
此心焉得似枯槎

영호루

나그네 시름이 비 만나 더한데
더구나 가을 바람에 더욱 심란하구나.
홀로 누에 올랐다 해 져야 돌아옴이여
다만 술잔 들어 집 그리움 잊는다.
은근히 벗을 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쓸쓸히 정을 품고 늦은 꽃을 향하구나.
한 곡조 맑은 노래 숲 속을 울리는데
이 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같이 되었나.

이황(李滉) 1501 ~ 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 관은 대제학(大堤學).

 

 

 

 

 

*구봉령(具鳳齡) 시


過映湖樓次韻

府城名勝洛湖多
鳳輦經過氣像加
金牓影搖銀漢界
朱甍光拂太淸家
樓中客去千秋鶴
笛裏梅殘五月籠
冠盖年年江上會
路人爭指泛仙槎

영호루를 지나며

성 안의 명승은 낙동호(洛東湖)에 많으니
나랏님 지난 곳 좋은 기상 더하다.
금자현판 은핫물에 그림자 지고
붉은 기와 우련히 누각을 비춘다.
다락을 떠난 객은 천추학(千秋鶴)이 되어 있고
피릿가락 매화 지고 오월꽃 피네.
선비들 해마다 강 위에 모여 노니
이곳 사람 다투어 뱃놀이 보네.

구봉령(具鳳齡) 1520 ~ 1585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본관은 능성(綾城). 관은 대사헌(大司憲).

 

 

 

 

 

 

*김극일(金克一) 시


映湖樓

麗王東幸此登樓
金字紗籠
31)泳碧流
筆力若能挽世道
三韓當作一金甌

영호루

고려 왕 동행 길에 이 누에 올랐것다.
금빛 글씨 비단에 싸여 푸른 물에 비침이여
붓힘으로 세상 도(道)를 돌릴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당장에 천국되고 남았으리.

김극일(金克一) 1539 ~ 1602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峯). 본관은 의성(義城), 관은 내자시정(內資寺政).

 

 

 

 

 

*이정신(李正臣) 시


映湖樓

壁上紗花閱歲多
珊瑚玉樹宛交加
東南形勝稱玆邑
前後風光屬我家
檻外分留千古月
林間開落幾番花
驅馳原濕王程急
銀漢忙回博望槎

영호루

벽 위의 이끼는 오랜 세월 겪었고
산호 같은 수목들 멋진 조화 이루었네.
동남땅 빼어난 고을로 이름난 곳
주변 고운 풍경 내 집까지 이어졌구나.
난간 밖엔 천고의 달이 비치고
숲 속의 꽃은 몇 번이나 피고졌을까?
급한 왕명따라 이 곳에 달려오는 길
은하수 밖에서 급히 배 타고 왔노라.

이정신(李正臣) 1660 -1727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자는 아언(我彦), 호는 송벽당(松蘗堂), 본관은 연안(延安), 관은 경기도 관찰사.

 

 

 

 

 

 

*여필용(呂必容) 시


映湖樓

靑蛇往事問無憑
長嘯危欄試一登
近水元龍猶厄運
誇秋河伯更成稜
淺深丹碧看新舊
倏忽滄桑感廢興
雕飾芳菲吾豈敢
前人遺跡也堪徵

영호루

청사
32)에서 보낸 세월 하소연할 데 없어
긴 휘파람 불며 높은 누대에 오른다.
가까운 물에는 진등
33)의 기세 꺾이지만
짙은 가을에 하백
34)의 위엄은 더한다네.
단청빛 엷고 얕음 속에 고금이 구분되니
갑자기 세상 변천의 감회만 일어나도다.
누대에 향기론 꽃 단장하길 원치 않으니
선인들 유적이 뚜렷이 증거됨일세.

여필용(呂必容) : ? ~ ?
조선 숙종 때의 문신, 관은 안동부사.

 

 

 

 

 

*류여희(柳汝懷) 시


映湖樓

六載玆樓再度憑
繡衣前客竹符登
長橋偃月波生纈
曲楹棲雲綵作稜
華額今傳停鳳輦
遺祠爭說贊龍興
試看野外盈畦雪
來歲豊穰喜瑞徵

영호루

육 년만에 두 번째 다시 찾은 누대
어사 앞의 나그넨 부절
35)차고 오르네.
긴 다리 위 기운 달빛 물결 따라 일렁이며
굽은 난간에 깃든 구름 비단결로 비치네.
빛나는 현판은 공민왕 친필이라 전하고
사당에선 다투어 임금의 성덕을 칭송하네.
들녘에 저렇게 많은 눈 내렸으니,
내년에 풍년들 좋은 징조 기뻐라.

류여회(柳汝懷) ? ~ ?
조선시대의 문신.

 

 

 

 

 

*강침(姜忱) 시


映湖樓

樓下風煙樓上多
長林極目翠交加
逈臨二水中分處
高出三韓一統家
霽色軒前峰有月
穩流檻外浪無花
湖心點點支機石
今古誰乘銀漢槎

영호루

누대 아래 안개 피어 누 위까지 자옥하고
저 멀리 긴 숲엔 푸르름이 뒤섞였구나.
멀리 두 물줄기 나누어진 곳
삼한을 하나로 합한 집 우뚝 솟았네.
누대 앞에 안개 걷히자 산봉우리 달 오르고
난간 밖의 물결은 잔잔하여라.
호수에는 군데군데 낚시하던 돌이 있는데
고금에 그 누구가 은하수 배 띄웠을까?

강침(姜忱) ? ~ ?
조선시대의 문신.

 

 

 

 

 

*홍우서(洪禹瑞) 시


映湖樓

徙倚高樓逸興多
東南形勝此無加
峰巒隱隱開三峽
都護槃槃簇萬家
席上芳樽傾竹葉
風前長笛落梅花
蘭舟更沂澄江月
天外疑乘不繫槎

영호루

높은 누대에 기대니 흥이 절로 일어나
동남의 빼어난 경치도 이보단 못하리.
희미한 산봉우리 삼협
36)이 펼쳐있고
대도호부 고을에는 수많은 집 빽빽하여라.
맛난 술 대나무잎 술잔으로 기울이는데
바람결에 피리소리 들려오고 매화는 지는구나.
난초 배를 거슬러 올라가니 강물 속 달빛 곱고
하늘 멀리서 두둥실 배 탄 것 같네.

홍우서(洪禹瑞) 1662 - 1716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자는 중웅(仲熊), 호는 서암(西巖), 본관은 남양(南陽), 관은 대사간(大司諫), 시문에 능하고 당대의 명필.

 

 

 

 

 

*이인복(李仁復) 시


映湖樓

玆州判是宿緣多
三到偏疑物色加
額上龍咬恭愍筆
瀤西雲木給弧家
南城銅柱留荒月
北里笙歌繞雜花
檻外長湖何恨意
尋源直欲泛輕槎

영호루

이 고을은 옛부터 인연이 많은 곳
세 번째 찾아오니 풍경이 더 좋도다.
누대엔 공민왕 친필이 걸려있고
강 서쪽 구름낀 나무 너머엔 마을이 보이네.
남쪽성 구리기둥 위 쓸쓸히 달빛 빛치고
북쪽 마을 피리소리는 꽃을 에워쌌도다.
난간 밖 긴 호수 무슨 사연 담고 있나
물줄기 따라 곧 가벼운 배에 오르네.

이인복(李仁復) : ? ~ ?
조선 경종 때의 문신, 관은 안동부사.

 

 

 

 

 

 

*이철보(李喆輔) 시


映湖樓

桐鄕物色倚欄多
手拂紗籠感意加
三世重遊應有數
一樓頻坐便如家
塵迷古壁仍垂網
苔生荒階自作花
萬事沈吟雙涕淚
堤邊楊柳半成槎

영호루

선비 고장의 물색 누대에 펼쳐지고
청사초롱 들고보니 감회가 깊도다.
삼 대가 이어 찾아온 건 운세에 달린 법
여러 번 누대에 오르니 내 집같이 편안하여라.
먼지 낀 옛 벽엔 거미줄 얽혔고
거친 계단의 이끼는 저절로 꽃을 이루었네.
만사를 회상하니 두 줄기 눈물만 쏟아지는데
강가 언덕의 수양버들 반쯤 뗏목을 이루었네.

이철보(李喆輔) 1691 ~ 1775
조선 경종 때의 문신.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菴), 지산(止山), 본관은 연안(延安). 관은 예조판서.

 

 

 

 

 

 

*한광조(韓光肇) 시


映湖樓

棟宇千年古意多
孤雲遠樹暮看加
沙圍欄外雙江水
春滿城東萬樹家
疵政每慙彭澤菊
歸心頻夢穎濱花
靈源知有黃池近
料理輕舟繫柳槎

영호루

천 년 세월 지나온 누대 사연이 많고
먼 나뭇가지 구름은 석양에 짙도다.
난간 밖 모랫벌엔 두 줄기 강물 흐르고
봄 가득한 동쪽엔 마을이 빽빽히 들어섰네.
흠 남긴 정치 때문에 늘 국화꺾는 도연명
37)을 사모하여
돌아가고픈 심정으로 늘 영숫가
38) 꽃을 꿈꾼다네.
낙동강 발원지가 황지땅임을 알고서
가벼운 배 타려고 버들 뗏목을 택했네.

한광조(韓光肇) 1715 - 1768
조선 영조 때의 문신(文臣). 자는 자시(子始), 호는 남정(南庭), 남애(南厓), 문과에 장원 급제, 관은 대사헌(大司憲).

 

 

 

 

 


*홍의호(洪義浩) 시


映湖樓

天遠山低水獨多
長堤叢綠樹交加
人間別界凌風榭
嶺左雄城撲地家
玉麈談詩樽有酒
錦筵張樂妓如花
晩來扶上紅亭去
百尺橋疑博望槎

영호루

먼 하늘 산밑엔 물이 유독 넘실대고
긴 제방 빽빽한 수목 푸른빛 짙도다.
바람 부는 누대는 별천지 세상
39)이며
영남 좌도 웅장한 고을 집성촌일세.
맨 땅에서 시를 주고 받으며 술 마시는데
술좌석에서 꽃같은 기녀 풍악을 울리네.
늦게 서로 의지하면서 붉은 누대에 오르니
백 척 난간 하늘로 오르는 배 같구나.

홍의호(洪義浩) 1758 - 1826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자는 양중(養中), 호는 담영(澹寧), 본관은 풍산(豊山), 관은 예조 판서.

 

 

 

 


 

 

*한홍유(韓弘裕) 시


映湖樓

童遊如夢感懷多
湖水空流歲月加
野外疎鐘西岳寺
城邊老柳太師家
古墟樓起新文榟
兩世詩懸古墨花
作宰龍州今又到
依依官柳已成槎

영호루

어려서 놀던 곳 아득하나 감회는 깊고
강물 유유히 흘러 세월만 더해가네.
들판 너머 서악사 종소리 간간이 들리고
성 둘레 태사집엔 늙은 버들 늘어졌구나.
옛터에 누대 세워져 고을을 새롭게 빛내며
고려•조선 양대의 묵은 명시들이 걸려있네.
용주 고을 다스리다가 다시 이곳 원님으로 오니
관아의 버들 늘씬하게 자라 배 만들 수 있겠네.

한홍유(韓弘裕) ? ~ ?
조선시대의 문신.

 

 

 

 

 

*이집두(李集斗) 시


映湖樓

水光山色一樓多
吳楚風煙未有加
芳草洲生明月棹
古槐城出夕陽家
燕聞咫尺通河漢
龍臥中間劈浪花
不必凌虛須羽化
玉泉將上欲乘槎

영호루

강물과 산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오나라 초나라 물안개도 이보단 못하리.
고운 화초 핀 강가는 달밤 뱃놀이하기 좋고
늙은 홰나무 성밖으로 뻗은 마을엔 석양빛 감돈다.
지척간의 제비는 은하수 길로 날아오르며
강에 누운 용은 흰 물결 가르네.
신선되어 오르는 것
40)부럽지 않으니
옥같은 샘물 찾아 배 타고 거슬러 가려네.

이집두(李集斗) 1744 - 1820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본관은 경주(慶州), 관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오연상(吳淵常) 시

映湖樓

女娘解唱洛東謳
玉笛寥寥香共浮
湖海風流凌萬頃
蓬萊消息杳千秋
白雲蕩影平臨岸
芳草無邊逈接洲
歷略勝區偕宿志
楓辰花月卜重遊

영호루

여인이 즐거이 낙동요를 부르니
옥피리 고요하여 향기마저 감도네.
호수의 풍류는 만경의 푸른 물보다 낫고
봉래 소식은 천년 동안 아득하여라.
흰구름 그림자 드리우는 언덕에 다다르니
끝없는 초록빛 풀길 따라 멀리 거슬러가네.
명승지를 둘러보려던 소원을 두루 이루고
단풍 들고 꽃피는 달에 다시 찾아왔노라.

오연상(吳淵常) 1765 - 1821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자는 사황(士黃), 본관은 해주(海州), 관은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학순(金學淳) 시 1-7


映湖樓-1

原隰經年疾苦多
容華全減鬢斑加
每逢佳節難爲客
忽到仙鄕若返家
野麥寒消前臘雪
驛梅香動早春花
此行歸日無遲速
泛泛如登萬里槎

영호루-1

왕명따라 이리저리 지내온 세월 근심이 많고
초췌한 얼굴엔 귀밑 털만 더하네.
매년 좋은 시절되어도 풍류를 즐기지 못하다가
갑자기 신선 고을에 이르니 고향 온 것 같도다.
들녘 보리는 섣달 전의 추위로 시들었고
역의 매화는 향기피워 이른 봄꽃 피었네.
이번 행차는 돌아갈 길 재촉 받지 않으니
둥둥 만리 길 배 타고 떠나리라.

김학순(金學淳) 1767 - 1845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자는 이습(而習), 호는 화서(華棲), 본관은 안동(安東), 관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映湖樓-2

黃鶴三登宿債多
後來風物交前加
衰齡淸福爲仙吏
屢世玆鄕卽我家
二水縈廻巴字帶
千峯粧點錦屛花
可憐無數湖邊柳
一十年間半古槎

영호루-2

황학루에 세 번 올라보려던 소원이었는데
뒷날 다시 오니 풍물이 전보다 성하여라.
늘그막에 맑은 복으로 이 고을 원님 되니
선조들 여러 대 살아 고향이나 다름없네.
두 가닥 강물 돌아 흘러 큰 뱀의 형상이요
단장한 봉우린 수 놓은 꽃비단 병풍일세.
가련하게도 호수가 몇 그루 버들은
십 년 사이 반이나 고목이 되었구나.

김학순(金學淳)

映湖樓-3

暇日登臨麗景多
芳洲紅綠影交加
琴棋翰墨皆公事
魚鳥雲烟屬自家
十里亭臺人似霧
兩竹歌舞妓如花
金門灘下黃昏月
餘興中流載片槎

영호루-3

한가한 날 누대에 오르니 고운 경치 펼쳐져
방초 짙은 물가엔 홍록색이 섞여있구나.
거문고•바둑•시짓기는 모두 공무요
고기•새•구름•안개는 나의 친구라네.
십 리 누대서 멀리 보이는 사람 안개 같은데
두 줄로 서서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 꽃같이 곱구나.
누대가 금물결에 비치고 석양에 달 오르고
못다 한 남은 흥취 조각배에 싣도다.

김학순(金學淳)

映湖樓-4

月明沙白鶴飛多
特地風光畵莫加
宜有神仙於此閣
好敎太守便如家
山連巫峽時時雨
水接桃源處處花
五月凉湖無大暑
憑欄疑是坐浮槎

영호루-4

달 밝은 모래 벌에 여러 마리 학이 날고
특출한 풍경은 그림보다 뛰어나도다.
이 누대엔 신선이 머물러
나에게 집처럼 편하다고 일러주는 것 같구나.
산은 무협으로 이어져 때때로 비내리고
강은 무릉도원에 접해 곳곳마다 꽃 피었네.
오월달 서늘한 호수는 더위도 없어
난간에 기대니 배를 타고 앉을 것 같구나.

김학순(金學淳)

映湖樓-5

前人之述此樓多
題品難容一字加
雲月悠悠閒世界
文章往往大方家
銷憂永日澄江水
縱醉東風滿郭花
我與白鷗新有約
從渠擬買一漁槎

영호루-5

앞 시대 사람들 이를 두고 많이 서술했기에
그 저술에 한 글자도 더하기 어렵도다.
구름과 달 느긋하여 세상은 한가하니
이 땅에서 때때로 큰 문장가가 배출된다네.
맑은 강물 위에서 종일 근심 삭히니
비록 취했어도 봄바람은 성의 꽃에 나부낀다.
나와 흰 기러기 함께 만나자는 약속했으니
고기 잡는 배 빌릴 필요없다네.

김학순(金學淳)

映湖樓-6

名區嘯詠聖恩多
圖報微誠自勉加
樓坐何曾排訟牒
郊行亦是慰農家
浮沈宦迹江湖雁
開落春光嶺嶠花
來汝漁翁時問答
使君心事證虛槎

영호루-6

이름난 곳에서 임금님 은총을 많이 읊고
은혜 갚으려는 미미한 정성으로 스스로 힘쓰네.
어찌 누대에 앉아 송사 문서 뒤척이랴?
교외로 순행하여 농가를 독려한다네.
벼슬길 부침함은 강가 기러기 같고
봄빛이 오가는 영남 고을일세.
찾아오는 어부와 때로 대화 나누는데
그대 마음은 빈 배 같다고 하네.

김학순(金學淳)

映湖樓-7

嶺左山川閱眼多
福州佳麗更無加
滄桑不改恭王筆
喬木猶傳大姓家
古調千年餘玉笛
晩香十月尙黃花
樓頭水與天池接
朝暮如逢博望槎

영호루-7

영남 좌도 산천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복주땅보다 더 고운 곳 없었네.
세월은 흘러가도 공민왕 친필 완연하고
권세있는 문벌과 큰 성씨 집안이라네.
옛 노래 천 년 지나 피리에만 남아 있고
시월 늦은 향기 국화에 남아 있도다.
누대 머리엔 물과 은하수가 맞닿아
곧 배 타고 가서 만날 것만 같구나.

김학순(金學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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