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은 지정문화재 281점과 서원·종택·정자 270점으로 그중 목조문화재가 약80%인 450점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봉정사와 남한 4대루 중의 하나인 영호루(映湖樓)가 있다.
또한 안동은 정신문화의수도 답게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 선유줄불놀이 등 유·무형 문화재가 많아 가장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2005년 부시 전 미국대통령이 다녀간 안동이다.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안동의 영호루(映湖樓)는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려 왔으며 映湖樓(영호루)현판은 현존 자료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 인 고려 말 공민왕(1380년) 필적으로 전해지는 현 시청에 걸린 安東雄府(안동웅부)현판과 映湖樓(영호루)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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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청량(太白淸凉) 이어 밟은 막대 낙연도산(落淵陶山) 휘돌아와, 귀래정(歸來亭) 쌍단도(雙短棹)로 일성장적(一聲長笛)
느릿 불며, 석양에 싫쟎은 기약이 영호루인가 하노라.”
<옥소고(玉所稿)조선 숙종~영조 연간의 문인 옥소 권섭이 지은 시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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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는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누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富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피난 중에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고 활쏘기도 하였으며 환도 후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영호루”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영호루에 달게 하였다고 전해지며 영호루는 여러 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유실이 5차례, 중수가 7차례 이루어졌다.
1934년 7월23일 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때의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남아 있어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의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 위치(안동시 남선면 정하동 소재)에 철근 콘크리트 한식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 현재의 영호루(映湖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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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우편엽서의 영호루<20세기 안동의모습 안동시.예총 안동지부발행> |
공민왕의 친필인 “영호루”(映湖樓) 금자(金字) 현판은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의 홍수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었고, 1934년 7월23일 갑술년(甲戌年)대 홍수 때에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아 현 영호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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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술년 수해시 영호루 잔해<20세기 안동의모습 안동시.예총 안동지부발행> |
이처럼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영호루는 안동 임하 양 댐 건설로 수해의 걱정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옛 모습은 간곳없이 낙동강 건너편에 철근 콘크리트 한식 누각으로 덩그러니 서있다.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자처하는 안동은 한반도 대운하와 연계, 관광문화 도시로서의 위상을 위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영호루가 아닌 옛 자리, 옛 모습인 시민들 마음속의 영호루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 영호루 유허비
혹 옛 자리, 옛 모습이 복원 된다면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 옛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한 바와 같이 영호루 누각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경관을 바라보며 선인들의 혼과 연을 맺고 회포를 풀어 봄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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