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전라도♧광주

영암 왕인박사유적지

자즐보 2013. 11. 24. 18:10

 

 

 왕인박사유적지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인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전하는 성천(聖泉)이 있으며,

탄생지 옆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또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冊堀)과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가 있다.

 

 왕인박사는 백제인으로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백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는

화이길사(和邇吉師), 일본서기에는 왕인이라고 그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은 물론 기술공예의 전수,

일본가요의 창시 등에 공헌함으로써 일본 황실의 스승이며 정치고문이 되어

백제문화의 전수를 통하여 일본 사람들을 계몽한 일본문화사상의 성인으로

일본 비조문화(飛鳥文化)의 원조가 되었다.

 

이 유적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사당을 비롯한 유적지정화사업을

시작으로 왕인공원 등 성기동 문화관광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10월 29일 부터 11월 17일 까지 왕인국화꽃축제가 개최되어

11월 21일에도 국화꽃으로 뒤덮혀 있는 모습이다.

 

 

왕인문(王仁門)

 

 

월악영묘 계작성철(月嶽靈妙 繼作聖哲)

월악산이 신령하고 오묘해서 계속 성인과 철인을 배출한다는 뜻...

 

 

천인 천자문

 

 

천 사람이 천자문 한글자씩 써서 기증한 "천인천자문"으로

기증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天=영암군수, 地=김대중 (전)대통령...

 

 

영월관(靈月館)

왕인박사의 업적과 당시 백제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으며, 2층은 영상실및 전시실이다.

 

 

 

백제관음상

 

 

 

 

 

 

 

왕인박사상

 

 

왕인박사 일대기를 총 6개의 부조로 형상화했다.

 

 

신선태극정원

왕인문화축제 10주년을 기념하여 한·일 상생을 상징하는 청룡,황룡의 정원 조성

 

 

 

왕인지묘

일본 히라카타시의 실제 묘를 이곳에 가묘로 재현해 놓았다.

 

 

 

 

봉선대(鳳仙臺)

왕인박사유적지에서 행해지는 행사와 축제의 주요장소다.

 

 

 성담(聖潭)

 

 

 

 

 

 

월악루(月岳樓)

 

 

수석전시관

 

 

망우정(忘憂亭)

모든 근심을 잊어 버리고 편히 쉴 수 있는 정자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유허비

 

 

 

홍살문

 

 

 

백제문(百濟門)

 

 

전시관(展示館)

왕인박사의 탄생과 일대기를 기록화하여 전시한 곳

 

 

정화기념비

 

 

학이문(學而門)

 

 

왕인묘(王仁廟)

왕인의 위폐와 영정을 모셔놓은 곳으로 매년 이 곳에서 왕인춘향대제를 지낸다.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 375-384년)때에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여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이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왜왕 응신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도왜한지 7년만에

백제의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다.

백제 17대 아신왕때 왕인은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당시 왕인은 32세 였으며,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때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 들이 큰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제명당(齊明堂)

왕인박사 추모제를 지낼 때 모든 준비를 하는 곳 

 

 

천자문 계단

총 250계단으로 계단마다 천자문이 4자씩 적혀 있어 

 계단을 오르면서 천자문을 공부할 수 있는 체험장이다. 

 

 

 

 

250계단 위에는 망월정이 있다.

 

 

 

문필봉 중턱에 있는 문산재는 왕인박사가 공부했던 서당이고

 양사재는 지인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던 곳이다.

왕인석상은 높이가 2.75m정도로 제자들이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하며 만들어 세웠다고 전해진다.

왕인석상 옆에 사람하나 겨우 드나들만한 입구에 네댓 평 정도의

 평평한 바닥을 가진 자연동굴로 왕인박사가 책을 쌓아두고 공부한 곳이다.

 

 

 

국화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