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孤雲寺)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415(구계리 116) 소재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으나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
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고운사 진입로
고운사 법계도림
등운산 고운사(騰雲山 孤雲寺)
고운노인요양원
천년 송림체험로
가을 정취드리운 경내로 들어가는 비포장 길
등운교(騰雲橋)
일주문 주변
백련암(白蓮庵)
원래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던 장소로 현재는 수련회나 재가불자들의 선방으로 사용된다.
고운사 호랑이벽화
용왕각(龍王閣)
용왕을 탱화로 조성하여 모신 전각이다. 옛 자리에 1997년도에 다시 지었다.
조계문(曺溪門), 등운산 고운사 일주문
사찰의 입구로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이다.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일부문을 꼽으라면 고운사의 일주문을 추천하는 이들이 많다.
고운사 안내도
천왕문(天王門)
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 동서남북을 관장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ㆍ증장천왕ㆍ광목천왕ㆍ다문천왕이 조성되어 있다.
남방을 관장하는 증장천왕 &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
북방을 관장하는 다문천왕 &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고불전(古佛澱)
오래된 석불을 봉안해 놓은 아주 작은 전각으로 그 요철 모양의 구조가 특이하다.
가운루(駕雲樓)
최치원이 지었다고 우각이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계곡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었다.
우화루(羽化樓)
가운루와 마찬가지로 최치원이 세운 누각이다.
극락전 아래에서 법당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고운사 가운루.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 가운루이다.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산과 구름을 접하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 가람으로서 전통을 자랑하고, 가람 건축의 짜임새도 뛰어난 곳이다.
의상대사 창건설 말고도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전설인즉,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라는 두 스님과 이 곳에 와서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누각을 건립하였고, 이 때부터 최치원의 호를 좇아 고운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이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풍미했을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다. 뒷산의 명칭도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이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물론 도교 또는 풍류도의 도사가 불교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이 땅의 산세가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신라말에 최치원과 관계가 되었기에 형성된 창건 연기가 아닐까.
가허루(駕虛樓)는 현재 가운루(駕雲樓)로, 우화루(羽化樓)는 우화루(雨華樓)로 이름이 바뀌었다.
종각(鐘閣)
법고ㆍ범종ㆍ목어ㆍ운판의 사물(四物)이 설치되어 있다. 조석예불에 그 소리를 낸다.
고운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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