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영주시

안자유적지

자즐보 2013. 7. 13. 06:30

 

 

 

안자(회헌 안향)유적지

 

회헌 안향(1243,고종 30 ~1306, 충렬왕 32)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순흥,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우씨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이 되었으며, 그후 판도사좌랑·감찰시어사, 국자사업을 거쳐 

1288년 우사의·좌승지를 지내고, 1289년 좌우사낭중이 되었다.

 

11월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었다.

그해 8월 왕을 따라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이 복위된 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랐다.

1303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향려비각(鄕閭碑閣)

성리학의 종조인 안자(安子)께서 탄생한 곳을 기리기 위해

1656년(효종 7) 순흥안씨 후손들이 세운 향려비 

 

 

 

 

 

 

 

 

 

세연지(洗硯池)

안자선생이 유년시절 공부를 하며 붓과 벼루를 씻었다는 연못을 복원한 것..

 

 

 

 

 

문성공 안자 영정각 

 

 

 

 

 

고려는 고종말에 원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하게 했다. 충렬왕 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남송(南宋)을 멸하고 명유(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정주학(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으며,

1297년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셨다.

또한 1303년 국학학정 김문정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악기 및 육경·제자·사서·주자신서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아울러 문교진흥을 위해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1304년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향려단구지(鄕閭壇舊址)

 

 

 

 

향려단유허비(鄕閭壇遺墟碑)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 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장지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모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1319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 순흥에 그의 사우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떠 백운동서원을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이 내려졌다.

그밖에 장단 임강서원, 곡성 회헌영당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자사료관(安子史料館)

 

 

 

 

안자유적지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