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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자즐보 2013. 7. 9. 14:20

 

 

소수서원(紹修書院)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 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와서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우리나라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소수서원 입구, 매표소

 

 

경내에는  3백년에서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는데,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세한송(歲寒松) 학자수(學者樹)라 불렀다.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세조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숙수사는 소실되고 유일하게 당간지주만 남은 것이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문화재조사를 기록한 「순흥지」에 의하면,

원래는 당간석의 받침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높이 3,910mm

폭 520mm 의 거대한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의 규모와 조각의

수준으로 보아 당시 숙수사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약 500년) 

 

 

 

 

 

 

 

경자바위(敬字巖)와 취한대(翠寒臺)

 

 

경자바위

경렴정에서 죽계수를 격하여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돌출된 바위가 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오, 회헌 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한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온다.

 

덧붙여 이 敬자바위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취한대(翠寒臺)

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 죽계천의 건너편에는 운치 있는 자태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자가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경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翠’와

차가울 ‘寒’자에서 따온 것이다. 취한대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둥과 기둥사이는

출입하는 전면 중앙 칸을 제외하고 모두 난간으로 막았다.

 

죽계수를 굽어보며 홀로 앉은 취한대는 산뜻하고 깨끗한 풍취를 자아낸다.

 

소백산 남쪽 옛날 순흥 고을                  
 죽계 찬 냇물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         
 인재 기르고 도를 밝힌 공 한없이 우뚝하고   
 사당 세워 현자를 높임은 우리 나라 효시였네.
 우러르고 사모하며 모여드는 저 인재들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     
 옛분 볼 수 없어도 그 마음 느껴지니         
 차고 맑은 저 냇물에 휘영청 밝은 달빛       

         - 백운동서원 생도들에게 [白雲洞書院示諸生〕
      기유년 풍기군에 부임하여  퇴계 이황 -

 

 

 

경렴정(景濂亭)

경렴정은 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 건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에서 첫 글자‘濂’자를 취했고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景’자를 취해 붙인 것이다.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건물로 우물마루바닥에 4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일필휘지의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다.

 

서원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詩宴)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고산 황기로 선생의 친필, 초서체로 쓴 경렴정(敬濂亭) 

亭자의 감고 치켜 올린 꼬리 부분이 원래는 용틀임하는 모습이었으나

일제 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글씨를 보고 큰 인물이 나는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를 꺽는다며 글씨 꼬리부분을 잘랐다고 한다.

 

 

 

성생단(省牲壇)

홍전문 앞 무덤같은 것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될 제물을 간품하는 번제단이다.

 

 

 

지도문(志道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며,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를 향해 뜻을 세우고 나아감을 이르는 말..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

 

 

강학영역, 학문을 닦고 배우는 공간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려 있는 강학당(보물 제1403호)  

이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다. 대청 북편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강당에서 길러낸 원생이 4천여 명에 달하며, 대부분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생이  망라되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학문을 강론하던 강학당 대청

 

 

강학당 대청에 걸려 있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으로 복사본이다.

 

 

강학당 서편 모습

 

 

강학당 동편 뒤에 있는 지락재(至樂齋) & 학구재(學求齋)

학구재와 지락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 일신재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예(禮)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

(經師易遇 人師難逢)’는 말이 무색해진다.

 

 

지락재(至樂齋)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학구재(學求齋)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강학당 뒤편의 교수 집무실인 일신재(日新齋)와 

원장 집무실인 직방재(直方齋)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년(순조5년)에

건축되었으며 전형적인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주역(周易)」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각각 ‘직(直)’과 ‘방(方)’자를 취했다.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일신(日新)’은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제향영역, 제사를 지내는 공간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서원내 중요한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 신축한 목조건물이다.
영정각은 회헌 안향의 영정(국보 111호)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보물717호),

회암 주희, 문충공 오리 이원익, 문익공 한음 이덕형, 문정공 미수 허목,

영정 5점을 봉안 하던 장소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이 곳에는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문성공 회헌 안향(1243~1306년) & 문민공 신재 주세붕(1495~1554) 영정 

 

 

 

일영대(日影臺) 

 

 

 

정료대(庭燎臺) & 관세대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 씻는 대여를 올려 놓는 받침대

 

 

 

장서각(藏書閣)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이다.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 내사본(御製 內賜本)’을

비롯해 3000여 권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곳이며

이 건물은 1543년(중종38년)에 주세붕이 건립하였다.

 

 

 

 

문성공묘(文成公廟)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사당이다. 문성공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안축(安軸)·안보(安輔)·주세붕(周世鵬) 선생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인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서원창건 당시에 건립된 건물로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이어서

전통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매년 음력 3월,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묘문, 사당을 출입하는 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어 가운데 문으로는 신(神)이 출입하고

제관들은 동편 문으로 들어 가서 나올 때는 서편문을 이용하는데

이 곳에는 문이 하나 밖에 없고, 이 문으로는 신(神)만 출입할 수 있다. 

 

 

현판 글씨는 성균관 명륜당(明倫堂)현판을 쓴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사당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사당이 사(祠)라 칭하며 조정 내에서 많은 논의를 통하여

모든 대신들의 동의가 있고 이를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이 묘(廟)라 칭하고 있다.

그 예를 들면 조선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宗廟)가 있고

성균관에는 공자님을 모신 문묘(文廟-공자의 존칭인 大成至聖文宣王廟의 줄임말)가 있다. 

또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을 현충사라 하고

충장공 권율 장군의 사당을 충장사라 한다.
따라서 그 명칭만으로도 소수서원의 문성공묘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사당들 중에서도 그 격이 특별함을 알 수 있다.

 

안향은 고려말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하여 학풍을 진작한 공으로

동방주자학의 시조이자 안자(安子)로 추앙 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에 이어 고려시대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동방18현으로 선정되어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배향되고 있다.

이렇게 전국의 향교에 배향되고 있는 문성공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그의 고향인 이곳 순흥 땅에 따로 세우고 그 명호를 사(祠)가 아닌 묘(廟)로 지칭한 것은

동국성리학의 효시가 되는 문성공 안향의 위상을 말해준다.

문성공묘는 영귀봉 동쪽 어귀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수지리상으로

영귀포란형에 해당되는 명당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관들이 출입하는 문은 동편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사료관(史料館)

사료관에는 서원의 양대 기능인 「강학(講學)」과「제향(祭享)」을 주제로 하여

유물을 전시하였다. 우선 '강학'과 '제향'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제작하여

그 내용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연출 하였다.

또한 사당에 봉안된 안향, 안축, 안보, 주세봉 선생에 대한 설명과

서원의 발생, 운영, 교육, 제향, 사회적 기능 등 당시 서원의 역할에 대한 도판을 제작,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서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아울러 '학맥도', 선현문집', '경서류', '시판' 등을 전시하여

유교문화의 당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충효교육관(충효교육관, 사료전시실, 사무실)은 소수서원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홍보, 전시, 관리를 목적으로 1992년에 건립하였다.

    교육관은 160석의 좌석에 시청각 기기 등이 갖추어져 있어

    학술 세미나 및 연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소수서원중건기적비

     

     

     

    영귀천

     

     

    탁청지(濯淸池)

    겸암 류운용(謙菴 柳雲龍)선생이 1593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참배한 후 대를 쌓고 못을 만들었다는 구전(口傳)이 있었으나

    지락재(至樂齋)에 걸린 류운용의 시판(詩板)에 ‘못을 파고 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에 근거하여 지금의 장소를 시굴, 그 원형이 발견되어 복원한 것이다.

    한편 류운용이 못을 판  이후 1613년(광해5년)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다시 팠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탁청지는 푸른 하늘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맑은 연못으로 경내의 작은 죽계천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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