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풍천면

하회마을 충효당 & 양진당

자즐보 2013. 6. 13. 15:25

 

 

 

하회마을(河回村)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 사진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적 지형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세거(世居)한 성씨들
하회마을에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하회마을 사진

 

 
풍산류씨의 입향에 관한 전설
풍산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이 풍산이지만,
7세 전서 류종혜 공이 화산에 여러번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충효당(忠孝堂,보물 제414호)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유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 현판은 미수 허목 선생의 글씨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방문기념 식수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류씨 종가이다.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따서 ‘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한석봉이 쓴

‘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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