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풍산읍

연어헌(鳶魚軒)

자즐보 2013. 5. 16. 14:29

 

 

 

연어헌(鳶魚軒)

 

연어헌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송암 권호문이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앞쪽에 한글로 쓴 연어헌 현판이 하나 더 있으며

내부에는 무민재, 유정재 등의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다.

 

청성산 기슭에 낙동강을 굽어보며 자리잡고 있다.

연어란 솔개가 하늘로 날아 오르거나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 오르는 것이

다 진리의 작용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당호는 주세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측에 각각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누각 아래의 기둥을 약간 길게 하여 누각식 정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권호문의 본관은 안동이며 이황의 문인으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유학자이다.

 

 

 

 

연어헌(鳶魚軒)

연은 솔개이고, 어는 물고기다. ‘연어’는 ‘연비어약’의 줄임말이며, 이는 또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의 줄임말로 시경(詩經)에 나온다.
이는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조화 바로 그 자체를 설명하는 말로 쓰인다.

성리학에서는 이 구절을 천리(天理)가 천지 사이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연어헌은 신제 주세붕의 글씨라고 전한다.

 

 

 

 

권호문(權好文, 1532∼1587)

권호문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이다.

7,8세 나이에 이미, “창이 밝으니 해가 솟은 줄 알겠고, 산이 희니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네.[窓明知日上, 山白見雲生]”라는

시구를 지을 정도로 천부적인 시적 재능을 보였다. 15세 때부터 외종조부인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류성룡·

김성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 아래에 연어헌 무민재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송암은 그 기상에 있어 퇴계와 닮은 점이 많았다. 학봉 김성일이 일찍이 “퇴계 선생의 고요하고 묵묵하고 온화하면서 고상한

기상을 오직 이 사람만이 닮았다.”라고 말했다.
서애 류성룡은 송암이 살던 집을 지나면서, “평생을 공평하게 논한다면,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수 있네.”라고 그를 높이 추앙하였다.

사실 퇴계의 문하에는 조정에 나가 벼슬하여 경륜을 편 인물도 많지만, 초야에 묻혀서 학문 연구와 심성의 수양으로 일생을 보낸 제자들도 적지 않다. 송암 권호문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생동안 청성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자기 수양에 정진하며 일생을 보냈다. 학행(學行)으로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아

참봉, 교관(敎官) 등의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간 적이 없었다.

고향 친구인 백담 구봉령이 이조(吏曹)에 있으면서 6품의 관직에 천거하려고 하자, 송암은 자기가 지은 한거록(閑居錄)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뜻을 내비치자 백담은, “이 친구의 뜻이 이렇게 굳은데, 어찌 꼭 억지로 꺽어야 하겠나?”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벼슬을 권하지

않았다.

퇴계는 ‘깔끔한 산림의 기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였다. 시 읊기를 좋아하여 많은 한시를 남겼고,

한글로 된 시조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과 경기체가(景幾體歌) 형식인 ‘독락팔곡(獨洛八曲)’ 등의 작품도 남겨 국문학사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권호문은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되었다.

권호문과 매우 가까워 청성산을 나누어 가졌다는 학봉 김성일의 시 2편과 서애 류성룡의 시 1편을 적는다.

김성일의 시

푸른 강 서쪽 가에 내 머물러 있나니, / 滄江西畔爲淹留
인간 세상 세월이 빠르다고 뉘 말했나. / 誰道人間歲月?
내일 아침 어부가 뱃전 치며 떠난 뒤엔 / 明發漁翁??去
창랑의 맑고 탁함 누구와 얘기하리. / 滄浪淸濁與君謀

- 송암을 방문하여 주인에게 주다.
바위 아랜 맑은 시내, 시냇가엔 산인데 / 巖下淸溪溪上山
사립문은 한낮에도 오히려 잠겨 있네. / 柴門當午尙深關
솔 그늘은 뜨락 들어 찬 기운이 감돌고 / 松陰入院寒生玉
버들빛은 처마 비춰 푸르른 빛 어리네 / 柳影迷?綠欲班
온 세상이 호구를 다 거꾸로 입었는데 / 擧世狐?皆反着
누가 능히 거북점 쳐 비경에다 집 지었나. / 孰能龜卜破天?
벗님께선 유유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 故人自是悠悠者
오래도록 밝은 창에서 공자 안자 배우누나. / 長向明窓學孔顔



류성룡의 시
- 송암을 지나며 권호문을 생각하다[過松巖懷權章中]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니, / 詩老乘雲久
외로운 마을 지나는 나그네 슬퍼지네 / 孤村過客悲
일생의 일을 평론하면 / 平論一生事
백세의 스승이라 할만하네. / 堪作百世師
시린 구름 빛 아득한데 / ?遞寒雲色
늙은 나뭇가지 쓸쓸하여 슬픔을 자아내네. / 悲凉老樹枝
옛 벗의 뜰엔 가을 풀만 무성하네 / 秋草正離離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은 「연어헌기」에서

천지 사이의 뭇 형상과 사물들은 음양의 변화 속에 이루어진 조화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솔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노는 것은 모두 스스로 날고 스스로 뛰어 노니는 것이 아니라

날고 뛰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날고 뛰는 것에서 천지의 기운의 변화를 알아야 하고 그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인간은 천지간에 태어났으므로 이 같은 변화의 움직임과 그 조화의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나는 천지의 도를 궁구하고 조화의 근원을 탐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미루어 내 마음을 닦는다.”라고 하여

연어헌을 지은 뜻이 청성산(靑城山)의 뛰어난 풍광을 즐기고자 함이 주목적이 아니라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천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자 함에 있음을 밝혔다.

연어헌을 짓고 난 몇 년 뒤 송암은 관물당(觀物堂)을 짓는다. 관물당기에서 그는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은

사물의 종류일 뿐이다. 물이 스스로 물일 수 없는 것은 천지가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가 스스로 물을 낳을 수 없는 것은 이치[理]가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치가 천지의 근본이 되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임을 알게 된다.

천지로써 만물을 보면 만물도 각각 한 물건이고, 이치로써 천지를 보면 천지 또한 한 물건이 된다.

사람이 능히 천지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궁구하면 인간됨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만물이 다 천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치의 측면에서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격물치지에 힘을 쏟아 사람이 다할 바를 얻으면 그것이 관물의 의미일 것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권호문의 일관된 관심은 스승 퇴계 이황으로부터 받은 성리학적 이론 틀과 수양론적 자세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연어헌을 지어 자연 속에서 천리의 움직임을 깨닫고, 관물당을 지어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도리를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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