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하면

야암정사(野庵精舍)

자즐보 2013. 5. 5. 20:00

 

 

 

야암정사(野庵精舍)

 

야암정사는 야암(野菴) 김임(金恁) 선생이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또 인근의 선비들에게 강학을 하여

문풍을 진작 시켰으며 선생과 자제, 손자들의 합편문집인 『장고세고(長皐世稿)』가

편찬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야암정은 그 명칭을 김임 선생의 아호(雅號)를 따서 지은 것이다.

선생의 아호인 ‘野菴’은 선생의 처사적 삶을 대변해주는 것인데 선생이 자작한

「야암설(野菴說」에 “내가 평생 하는 일은 실속 없는 겉치레를 버리는데 힘쓰고 오직 속되고

야(野)함만을 숭상했다. 집은 야인이 사는 곳이요,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아호를 ‘야암’이라 한 이유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평생 처사로

살면서 자연과 학문에 묻혀 살고 싶어 하는 선생의 뜻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김임(金恁, 1604~1667)

본관은 의성, 자는 수이(受而)이며 호는 야암이다. 선생은 귀봉 공의 증손이며

운천 공의 손자이고 개호 김시주 공의 아들로 선조 37년에 태어나 현종 8년에 타계하였다.

선생은 인조 13년(1635)에 성균생원이 되었으나 병자년에 청나라와 동맹을 맺어 시사가

크게 바뀌자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인조 19년(1641)에 선생은 친명(親命)으로

성균관에 다시 들어가 초시에 5번이나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불리했다.

이후 평생 처사적 삶으로 일관하였으며 여러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선생은 학사 김시구, 표은 김시온, 갈계 김도 공과 더불어 도연사호(陶淵四皓)라고 칭해졌다.

 

선생의 처사론은 선생이 지은 「자만사(自挽詞」에 “행실은 남보다 못하고

덕은 사물에 미치지 못했다. 강호에서 늙어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살아서 세상에 도움이 못되고 죽어서 후세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애오라지 변화에 순응하여 죽어서 초목과 함께 썩음을 달게 여기리라.”고

잘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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