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풍천면

하회 옥연정사 & 화천서원

자즐보 2013. 4. 23. 15:54

 

 

 하회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선조 19년(1586)에 가깝게 지내던 탄홍스님의 도움으로 세웠다.

집은 문간채, 바깥채, 안채, 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양반집이면서도 안동지역 민가의 기본형인 도토마리(베틀에서 실을 감는 기구)집

형식으로 가운데에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을 둔 점이 특이하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에 관한 전후사정을 기록한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집필한 장소이기도 하다. 정사가 있는 부용대 아래 강은

물이 돌아나가는 깊은 곳의 옥소(玉沼)가 있는데, 소(沼)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

 ‘옥연정사’라고 했다고 한다.


“옥연정사에 배어있는 류성룡의 회한과 고독”
옥연정사는 선조 9년(1576)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10년만인 선조 19년(1586)에 완공했다.

류성룡의 나이 45세 때 였다. 류성룡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작은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스님이

10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하였다고 한다.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그는 ‘옥연서당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는 ‘인생이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부귀가 무슨 귀한 것이 되리요. 내가 옹졸하고 부족하여서

평소 행세하기를 원치 않았다. 사슴, 고라니 같은 내 천성은 산야의 삶에 알맞지

시정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여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권위적인 왕조, 진흙탕 같은

권력싸움에 시달리는 학자의 심적고통이 진하게 전해진는 대목이다.

이 집을 완공하고 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류성룡은 병조판서로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무를 담당하였고, 탄핵으로 면직후 만년에는 옥연정사로 돌아와 이곳에서 <징비록>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비참한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참회와 염원에서

그 수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책에서는 지배층의 무능과 위선, 부패와 무책임을

사실 그대로 드러냈고, 우유부단한 국왕의 모습과 백성들의 따가운 질책도 숨기지 않았다.

굶주림속에 식구를 잡아먹은 참상까지 담담히 적었다. 그는 왜군의 만행을 격앙되게

규탄하기 보다는 내부의 허물을 비판한 훌륭한 저서를 이곳 옥연정사에서 남겼다.

 

 

 

대문 앞 오른쪽 산자락에 세워져 있는 류성룡 선생의 시비

 

 

 

 

 

 

 

 

 

 

 

부용대/겸암정사로 올라 가는 산길

서애 류성룡은 이 산길을 올라 겸암정사에 계시는

형 겸암 류운룡을 자주 찾아 가서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네요

 

 

 

부용대로 올라 가는 산길에서 본 옥연정사 

 

 

 

낙동강 백사장에서 바라 본 옥연정사

 

 

 

옥연정사에서 본 강건너 하회마을

 

 

 

 

 

화천서원

 

문경공 겸암 류운룡(서애 류성룡의 형)의 학덕을 기려

유림들이 정조 10년(1786)에 겸암선생 위폐를 봉안하고

세운 서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

 

화천서원의 입구 유통문 & 지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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