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서후면

창열서원(彰烈書院)

자즐보 2013. 4. 23. 15:09

 

 

 

창열서원(彰烈書院)

 

 

창열서원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창열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9년(순조 9)에 안동시 서후면 송야리에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로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로 이건해서 춘·추향을 받들어 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9년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유의문(由義門)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의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인재(成仁齋)

성인재는 기숙사로 향사및 원내 행사시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내삼문, 사당 출입문 

 

 

 

하위지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열사(彰烈祠)

 

 

 

하위지(河緯地, 1412~1456)

본관은 진주, 자는 천장(天章),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 선산 출신으로 군수 하담(河澹)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하강지(河綱地)와 함께 학문에 전심전력하였다 한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이 되고,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경상감사에게도 전지를 내려 그의 병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하강지가

모함을 당하여 전라 감옥에 갇혀 병이 위독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되고,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되었다.

하위지의 강직한 기개는 이때부터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하위지는 대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선생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문종 때 『역대병요(歷代兵要)』수찬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품계를 올릴 것을 논의하여 올리자 이를 반대하였다. 하위지는 서적의 수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하등 가자될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이 가자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종신의 신분으로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위지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경상도 영산의 온정에 내려갔다.

그 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해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편수관으로 참여 하였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서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하위지에게

교서를 내리 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을 먹는 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먹지 않고 따로 한 방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가 관장 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1456년(세조 2)에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터인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요.”하였다. 하위지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 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창열서원은 하위지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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