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기념관
왕산 기념관은 임은동 출신인 구한말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9월28일 개관하였다.
왕산 선생은 13도 연합의병창의군 군사장 등 항일 의병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다.
9천851㎡ 부지에 건축 연면적 1천950㎡ ,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 어린이 도서관, 등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
왕산 허위선생 묘소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이곳 기념공원은 왕산선생의 생가터로서 1700년대 불고헌(不孤軒)
허돈(許暾,1753~1815)이 경남 김해에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무역업을 하던 허돈이 낙동강 뱃길로 서울로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이곳 구미
임은리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산천의 풍광에 반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돈은 왕산선생의 증조부이며 그 가문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왕산 허위선생 생애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학자 집안이었으며 허위는 어려서 부터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작은 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맏형인 방산공(舫山公) 허훈에게 글을 배웠다.
방산공은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쳤던 분으로 19세 연하의 동생에게 글을 가르치며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왕산 허위선생이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또한 후에 안중근의사(1879.9.2 ~ 1910.3.26)가 거사 후 법정에서 왕산 허위선생을 평하기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선생은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것이다.” 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허위선생의 인품이 어떠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855년 4월 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청추헌 허조(許祚)의 넷째 아들로 출생
*1896년 3월 김천에서 의병을 규합 성주, 충청도 진천 등지에서 활동 중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자진 해산 후 청송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9년 3월 벼슬길에 나서 5년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1905년 외교활동을 위한 비밀 독일방문계획 실패, 일본의 만행규탄 격문 살포로 체포
4개월 간 투옥, 벼슬을 그만두고 김천 지례로 은거하였다.
*1907년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 양주, 철원, 장단, 연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해산 당한 강화진의 관군까지 흡수하였고, 전국 13도 연합의병인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경기대장 겸임), 전라 문태수, 충청 이강년, 황해 권중희, 강원 민긍호,
평안 방인관, 경상 신돌석, 함경 정봉준 등과 양주에 집결한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은 서울 일제통감부
공략을 결정, 각 의병대가 분산 출발, 왕산선생은 300여명의 선발대를 지휘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후원군의 도착 지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연천으로 패퇴하였다.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의병들은 임진강 유역에 재집결하고 왕산선생이 연합의병의 총대장이
되어 활동,이때 총리대신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 관찰사나 내부대신의 자리를 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이를 꾸짖어 돌려 보냈다.
*1908년 5월 24일 연천에서 일본헌병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같은 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호 사형수로 교수형에 처해 순국했다.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조성기
이곳에서 태어난 위대한 항일의병장(抗日義兵將) 왕산 허위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고 거룩한 나라사랑 정신을 높이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선생의 생가터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일찍이 왕산 선생께서는 일제의 침략과 만행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수난을 당할 때,
충의(忠義)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총칼 앞에 서슴없이 나섰다.
그리고 선생의 일가는 가문 전체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민족운동사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선생께서 태어나서 자랐고, 또 구국(救國)의 높은 뜻을 세운 곳으
로서, 선생의 충심(忠心)과 정신은 오늘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기념공원에서 마주보는 앞산에 선생의 기념관이 마련되어 앞으로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으로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 > 구미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동향교(仁同鄕校) (0) | 2013.05.24 |
---|---|
긍운정,경파정,백운재 (0) | 2013.04.22 |
연악산 수다사(水多寺) (0) | 2012.12.02 |
모원당(慕遠堂) (0) | 2012.09.07 |
동락공원(東洛公園) (0) | 2012.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