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포항시

입암서원 & 일제당 & 노계시비공원

자즐보 2012. 12. 29. 12:33

 

 

 

입암서원(立岩書院)

 

입암서원은 조선 효종 8년(1675)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시 이 지방에 피난와서 살다가 죽은 문강공 장현광(1554∼1637)을 봉안하고

지방유림인 동봉 권극립, 우헌 정사상, 윤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고 있다.

 

 

 

 

 

 

 

 

 

 

일제당 & 입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 수암 정사진, 윤암 손우남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29년에는 노삼계,

박인노 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 사건으로 왜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

일제당은 평면구성에 있어 보간 2칸중 후열 3칸은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혔는데, 어칸이 마루이고 양측에 온돌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으며,

마루 뒷벽에 출입문을 세우고 누마루를 꾸며서 계자 난간을 돌렸다.

 

 

 

 

 

 

 

 

노계 박인로 시비 

 

입암서원 건너편 가사천 주변에 2001년 11월에 세운 노계 박인로의 시비이다.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의 규모로 세워졌는데 까만 오석에는

노계의 시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박인로 선생은 이 고장에 머물던 여헌 장광헌선생과 교분이 각별하여,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입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29곡인데 노계문학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입암 29곡은 노계 박인로(1561∼1642년)의 작품으로 입암의 절경을 노래한 시조로

1629년경 여헌 장현광(1554∼1637)선생과 같이 노닐면서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박인로 선생은 무관 및 시인으로 1561년 영천 북안 도천에서 태어나, 1642년까지 여든 두 해를 살았으며,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이다.
선생은 3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달려갔으며, 3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의 명을 받아 무인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을 정성껏 보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은 의병활동과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의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유학자로 전력하는 한편 성인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노계의 문학은 일상어를 통한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질박하면서도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체, 구성의 웅장함으로 일찍이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문학의 한지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8차례나 죽장을 방문하여 입암을 배경으로 가사<입암별곡>과 시조<입암29곡>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