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예천군

예천 표절사(表節祠)

자즐보 2012. 10. 2. 00:27

 

 

 

표절사(表節祠)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있는 조선시대 김저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다.

우왕 복위 운동을 벌인 고려 말의 무신 김저(金佇, 1304~1389)와 아들 계절당(繼節堂) 전(鈿),

손자 퇴신재(退愼齋) 두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다. 1508년 중종의 명으로 창건한 이후

매년 김저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렸으나 1864년(고종 1) 불에 타 없어져 1989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본당인 표절사와 선덕재, 홍인재,

명도문, 충의문, 신도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김저(金佇)?∼1389(공양왕 1)

고려말 충신 율은(栗隱) 김저(金佇) 는 김해김씨 율은공파(栗隱公派) 중시조이다.

목은(牧隱:이색), 야은(冶隱:길재), 포은(圃隱:정몽주)과 더불어 '고려4은'으로 추앙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그는 1304년(고려 충렬왕) 11월 4일 장흥 벽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사사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두(虎頭)장군으로 알려진 고려 최대의 영걸 최영(崔瑩)의 생질인 공은 18세에 생원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건적의 난 때에는 공민왕을 호종하여 안동, 예천, 상주로 몽진하였다. 형조, 예조, 이조의 전서(典書)와 성균관 대사성, 수문전 학사를 역임하였고 대호군을 지냈으니, 실로 문무를 겸한 위대한 경세가였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퇴관(退官)을 청하니 조정에서는 풍성군(豊城君)에 봉했다.

벼슬을 버린 그는 예천 은풍(慇豊) 사동(巳洞)에 은거하며 집주변에 밤나무를 심으며

스스로 율은거사(栗隱居士)라 칭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최영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죽은 이듬해인 1389년에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李成桂)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가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대간의 문책에 따라 변안열(邊安烈)·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왕안덕(王安德)·

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昌王)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그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

 

 

 

명도문(明道門)

 

 

 

풍성군율은김선생신도비(豊城君栗隱金先生神道碑)

 

 

 

표절사 중건비

 

 

충의문(忠義門)

 

 

위패를 모신 사당, 표절사

 

 

동재 선덕재(宣德齋)

 

 

서재 홍인재(弘仁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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