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대산 이상정(1711-1781)

자즐보 2011. 12. 13. 01:08

 

대산 이상정(1711-1781)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1711~81)은

‘소퇴계(小退溪)’라 불릴 정도로 출중한 선비였다. 진정한 학문 수행에 천착함으로써

도학(道學: 성리학)을 다시 꽃피우고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대표적 거유(巨儒)로, 퇴계 이후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퇴계 이황을 제일 존경하고, 평생 도학을 공부하며 퇴계학 정립을 위해 노력한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 올라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이상정 약력

    *1711년 안동 한산이씨 가문에서 출생, 1724년부터 외조부 밀암 이재에게서 수학 

    *1727년 장수황씨와 결혼, 1731년 ‘심경’ 읽고 ‘자경명’ 지음

    *1735년 대과합격, 1747년 병조좌랑, 1753년 연일현감, 1760년 고운사에서 ‘심경’ 강론

    *1767년 고산정사 건립

    *1910년 시호 ‘文敬’, 1917년 고산서원 배향


◆ 외조부이자 대학자인 밀암(密庵) 이재에게 학문의 기초 닦아
대산의 조부(석관) 시절 이야기다. 하루는 석양 무렵에 한 나그네가 석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석관은 길손을 사랑방으로 안내하고 며느리에게 저녁상을 차려 오게 했다. 그런데 과객은

저녁상을 윗목으로 옮겨놓은 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식사를 안 하는지 묻자,

과객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은 오늘이 아버님 제삿날입니다. 먼 길을 떠돌다 보니 제사를 모실 형편이 못 돼서,

이따가 시간이 되면 이 밥상으로 제사를 모시고 먹으려 합니다.” “그런 곡절이 있었군요.

국이 식기 전에 어서 식사를 하시오. 제사상은 다시 보아 오도록 하겠소.”

과객이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으나, 석관은 “제사를 그렇게 허술하게 모셔서야 되겠느냐.

새로 제사상을 마련하도록 할테니 미안해하지 말고 식사를 빨리 하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며느리를 불러 사정을 이야기한 뒤 제사상을 따로 마련할 것을 부탁했다.

며느리는 흔쾌히 대답한 뒤 상을 정성껏 마련했고, 석관은 옆에서 제사를 도왔다.

그날 밤 며느리의 꿈속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오늘 당신이 차려준 음식을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흰 구슬 두개를 주기에 치마폭으로 받았다. 그 후 태기가 있게 된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

대산이다. 대산에 이어 나중에 대산의 동생 소산(小山) 이광정이 태어났다.

대산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다. 이렇게 태어난 대산은 5세에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14세가 되어서는 외할아버지인 밀암(密庵) 이재(1657~1730)에게 나아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시경, 서경, 중용, 맹자, 태극도설, 주자서절요, 근사록, 가례 등 성리학과

예학에 대한 공부를 함으로써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20세 때 외조부이자 스승인 밀암이 별세한 후 그는 달리 스승을 정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서로 탁마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 참다운 학문 탐구와 제자 가르치는데 평생 매진
1735년 과거(대과)에 합격한 대산은 이듬해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의 권지승문원부정자라는

관직을 처음 맡았으나, 1개월 남짓 후에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여러 자리를 거쳤으나 사직을 반복, 실제 관직생활은 급제 이후 45년 동안 6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짧은 관직생활은 정치적 환경 탓도 있겠지만, 벼슬보다는 학문에 침잠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대산의 적성에 더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산에게 벼슬이나 권세는 학문과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선비가 벼슬을 하지 않으니 생활은 곤궁하여 쌀독이 자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별로 개의하지 않았다. 생계를 꾸려가기가 심하게 어려울 때는

소장하고 있던 소중한 책들을 팔기도 했다.

벼슬이 제수되어도 병 등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거나, 부모 봉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임하더라도 곧 물러났다. 근무기간을 채워 자리가 옮겨지는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관직에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직을 떠나서는 학문을 닦고 저술을 하며, 제자를 가르치는데

열성을 다했다. 더 앞선 학자를 찾아가서 탁견을 구하고, 동학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학식과 체험을 가르쳤다. 그것이 그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고향 마을의 대산서당(大山書堂), 고향 마을 인근의 고산정사(高山精舍)와 고운사 등이

그의 학문 공간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의 학문은 더욱 익어갔고, 그를 찾는 제자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이렇게 오로지 참된 학문의 길을 갔던 대산이기에 그의 문하에서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리던

동암(東巖) 류장원·후산(後山) 이종수 ·천사(川沙) 김종덕을 비롯해 손재 남한조, 묵헌 이만운 등

뛰어난 학자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호문은 대산 문하를 말한다.

그리고 선현들의 도학을 정리하고 주요 내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이기휘편(理氣彙編)’,

인간의 칠정에 대해 논한 ‘약중편(約中編)’, 퇴계의 학문 요체를 결집한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선현들의 심신수행에 대한 글들을 채집·분류하고 약주(略注)한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등

높은 수준의 성리학 연구물들을 누구보다 많이 남겼다.

◆ “일상 속에 진리 있으니, 일상을 떠나 별다른 것은 구하지 말라”
평생 심신을 닦는 학문을 해온 선비가 생을 마칠 때가 다가왔다.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인 1781년 12월1일(음력) 아들 완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력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평소에 잘 알던 경전을 외워 보았는데 평소와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7일에는 동생 광정이 가르침을 청하자 “일상 가운데 묘한 진리가 있으니 일상을 떠나서 별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8일에는 조카 윤에게 “지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병세를 묻고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감사의 뜻을 전하라”고 말한 뒤, 자고 싶다며 물을 받아서 양치를 하고 수염을 씻고 누웠다.

9일이 되자 대산은 숨이 곧 끊어질 듯하여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등에 통증이 있은 후로는 평소 누울 때 몸을 옆으로 하고 손발을 가지런히 했는데,

이날은 이른 아침에 몸을 돌려 거의 바른 자세로 누웠다. 그러나 하체는 옆으로 하였다.

모시는 아이가 부축해 다리를 바로하자 정신은 맑고 기상은 온화하였다.

얼마 후 대산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

그를 따랐던 제자 7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대산의 제자 김종섭과 류범휴가 대산의 죽음을 기록해 남긴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실려있는

내용 중 일부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공부를 점검하고 제자들에게 학문에 대해 문답을 나누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은 그가 참다운 학문을 했음을 드러낸 일이라 하겠다.

이듬해 3월 사림 1천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장례가 치러진다.

대산은 사후 35년이 흐른 1816년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1882년에는 이조판서에 증직된다.

그리고 1910년 시호 ‘문경(文敬)’이 내려졌다.

 

 

▼ 일직면 한산이씨 대산종가(경북문화재자료 제408호), 대산 이상정 선생이 태어난 집

 

 

▼ 남후면 고산서원(경북기념물 제56호), 대산 이상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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