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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이덕홍(1541,중종 36~1596,선조 29) | ||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 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 ||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오계서원, 경북문화재자료 제475호,1570년(선조 3) 간재 이덕홍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으로 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자 1600년(선조 33)에 이덕홍의 장남인 이시가 쌍계마을로 이건하고 한호의 글씨로 관성재·관서헌의 편액을 걸었고, 1665(현종 6)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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