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퇴계 이 황(1501~1570)

자즐보 2011. 12. 11. 09:38

 

퇴계 이 황(1501~1570)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경사스러울 때 이는 서운(瑞雲)이다. 선생의 글은 의복이며 음식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 유리 항아리다.

선생의 기상은 순결해 아름답게 갈고닦은 금과 옥이다. 산악처럼 무겁고 소와 샘처럼 깊고

고요하다. 바라보면 안다. 선생이 성덕군자가 되었음을.'학봉(鶴峯) 김성일이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1501~70)을 평한 글이다. 퇴계의 삶과 언행을 보면, 위의 글이 스승 퇴계를

포장하기 위해 하는 단순한 찬사에 그치는 빈 말이 아니라,

퇴계를 명실상부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황 약력
△1501년 안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1512년 숙부 송재공에게 형과 함께 논어 공부

△1527년 진사 시험 장원, 21세에 혼인한 부인 허씨 사망, 1530년 부인 권씨 맞음

△1534년 과거(대과) 합격, 관직생활 시작, 1540년 사간원 정언

△1550년 안동 계상(溪上)에 한서암(寒棲庵) 지어 정착

△1569년 이조판서 등 사양 △1570년 별세, 영의정 추증

△1575년 도산서원 건립, 시호 문순(文純: 도와 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文이라 하고,

중립해서 바르고 순수한 것을 純이라 한다)

◆ 70여차례나 벼슬 사양…명예·벼슬 욕심 없었던 퇴계
퇴계처럼 벼슬을 자주 사양한 이도 없을 것이다. 퇴계가 65세때 글을 올려 자신에게 내려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벼슬의 해임을 요청하자, 명종은 할 수 없이 허락하면서도

"내가 항상 그대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워놓은지 여러 해이건만 끝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무리하게 청하니, 이는 어진 사람을 대우하는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그대의 뜻이 깊고 간절하니 어쩔 수 없이 들어주노라"며 아쉬워했다.

어렵게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퇴계는 명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선조에게 또 불리어 여러 차례

사양 끝에 결국 1568년 우찬성으로 임명돼 상경한다. 이후에도 임금과 퇴계는 관직 임명을 놓고

줄다리기를 계속한다.

생의 마지막 해인 1570년 정월에도 퇴계는 또 벼슬을 갈아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올린다.

하지만 선조는 들어주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유지를 내린다. '경의 나이 비록 일흔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아니하노라. 그 관직을 교체하지 않는 것은 경의

어진 덕을 생각해 우선 갈망하는 것을 들어 준 것이지 사면하고 물러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을 내가 날마다 바라니, 역마를 타고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기 바란다.'

퇴계와 임금간의 이같은 줄다리기는 생을 마감하고서야 끝난다. 임금들의 퇴계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가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퇴계는 진정으로 벼슬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평생 동안 70회 넘게 벼슬을 사양하는 청을 올린다. 이런 이가 고금에 또 있을까 싶다. 

직접 체험통해 깨달은 학문과 수행 '제자들의 산 교재'
퇴계의 학문과 수행은 몸소 겪고 체험해서 깨닫는 데 있었다. 선배 유학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으려 하진 않고, 무엇이든지 체험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을 겪어보려 했다.

그 모든 경험은 제자 교육의 산 교재가 되고, 선배 유학자의 이론에서 진일보하는 힘이 되었다.

그런 퇴계는 털끝만큼도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은 '글자 한 자의 뜻이나 한 낱말의 뜻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고 정밀하게 탐구했고, 아무리 옛날 유학자들의 저술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믿는 일 없이 철저하게 천착하는 선생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퇴계의 학문은 당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이지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도리로서 지덕행(知德行)을 실천하는 것이지, 지덕행의 생활을 떠나

허식을 부려 남에게 자기를 알리는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였지만, 자신이 직접 남긴 묘지명 글에서는 '배움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할수록 더욱 불어나더구나. 나아가 일함에는 실패하고 물러나 갈무리함에는

뜻을 지켰으나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 말씀에 참으로 두렵구나'라고 했다. 

◆ 관료생활하는 집안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 가르쳐
벼슬하는 아들이 집으로 물건을 보내오자 퇴계는 편지를 보내 잘못을 지적했다.

'네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여러가지 물건을 보내왔구나.

그러나 이런 물건들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네가 사적으로 어버이에게 보내서는 안 되는

매우 부적절한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너의 고을에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네가 이처럼 물건을 보내오면 내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나의 뜻을 자세히 살펴주기 바란다.'

1570년, 퇴계가 별세하던 해 가을의 일이다. 아들이 봉화에서 감 한 접을 보내오자 퇴계는

다음 편지와 함께 감을 돌려보냈다. '…벼슬을 하고 있으면 많이 접근해 오므로 다른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평범한 재주의 네가 쇠잔한 고을을 맡아가지고 공사의 일을 양쪽 다 능히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는 일이다. 그런데 관물(官物)을 인정 쓰는데

다 써 버린다는 것은 국가에 죄를 짓는 일이다. 봉화에서 보낸 물건은 누가 갖다 준 것이더냐?

이번에 보낸 감 한 접은 되돌려 보내니 관에서 쓸 곳에 충당해라.'

이처럼 죽기 직전까지도 관리가 지켜야 할 공도를 가르쳤다.

퇴계는 관리를 다른 말로 냉관(冷官)이라 말하고, 냉관은 그 마음이 청렴하고 고요하며

담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이 관료생활을 할 때 이를 실천했고, 출사하는 집안 사람들에게도 누누이 가르쳤다.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해라.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은 저지르지 말아라.

관리의 마음은 지극히 맑아야 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부정한 일을 꼭 저지르고 만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 

버선 기워준 며느리에게 참빗 선물…가족간 예의 강조
손자가 장가를 갔을 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또 한편 가장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처지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은 모두 예와 존경함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며 인격을 멸시해 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은 때문이다.'

퇴계는 이론이나 말로만 교육하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척간에도 반드시 몸소 모범을 보이고

실천을 함으로써 본받게 했다. 생일날 며느리가 버선을 기워 보내자 참빗을 사서 답례를 했고,

손부가 옷을 지어보내니 편지와 함께 바늘을 사서 보냈다. 이처럼 가족에게도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하였다.

그는 또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늙은이나 젊은이, 양반이나 중인·상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같은 예로 대했다. 어떤 손님이든 모두 뜰 아래에서 맞았으며, 자신의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이 없었다.

사람과 교제할 때 처음에는 담담하지만, 오래 지낼수록 점점 믿게 되어서 지성으로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마음 속으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정문봉은 기록하고 있다. 

퇴계 불천위이야기
퇴계는 1610년 문묘(文廟)에 배향되면서 불천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굉필·정여창·

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배향되었다.

퇴계의 기일은 12월8일(음력)이며, 불천위 제사는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추월한수정

(秋月寒水亭) 대청에서 자시(밤 1시)에 지낸다. 참석 제관은 100명 정도.

퇴계 16세 종손 이근필옹(1932년생)은 "예전에는 숙박 등의 문제로 50명 정도 참석했는데,

교통이 편리해진 요즘은 제사 후 바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서 제관이 더 늘어나 100여명이

참석한다"고 말했다.

추월한수정 뒤편 사당에는 불천위 신주와 4대조 신주가 봉안돼 있다.

다른 종가와 달리 제수 진설 때 중포(中脯:포를 제상 가운데 진설)로 하는데,

그 사연을 종손이 들려줬다. 퇴계의 손부가 일찍이 혼자 되어 아들 없이 20여년 동안 직접

집안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잔을 올리고 할 때 제상 서쪽 끝에 차려놓은 포가

자꾸 옷자락에 스쳐 떨어지자 상 가운데로 옮겨 진설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과일 진설은 조동율서(棗東栗西), 이동시서(梨東枾西) 순으로 하고, 도적(都炙)은 게나 조개를

가장 아래 놓고 그 위로 비늘 있는 어물, 소나 돼지, 닭 순으로 쌓는다.

제수는 유밀과를 쓰지 않는 등 간소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제주는 1950년까지 가양주를 썼지만, 1951년 초상을 치를 때 제주를 담가놓았다가

상감에 발각돼 벌금을 내게 된 일을 겪은 이후 가양주는 범법행위인 만큼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술을 안 담갔다고 한다.

종손이 들려준 퇴계 유훈
1. 나라에서 베풀어주는 장례는 사양하라
2. 기름과 꿀로 만드는 과자를 쓰지 마라
3. 비석을 세우지 마라
4. 비문을 기고봉한테 쓰게 하지 마라
5. 모든 예법은 현재에 마땅하게 하고 옛날에서 멀게 하지 마라 (宜於今而 不遠於古)

▼ 안동 도산면 퇴계종택(경북기념물 제42호), 원래 건물운 없어지고 1929년 13대 손 하정公이 새로 지은 건물이다.

 

 

▼ 추월한수정,창설재 권두경이 숙종 을미년(1715)에 퇴계의 문인과 후손들의 도움으로

퇴계종택 옆에 지었다.

 

'웅부안동(雄府安東) > 안동 불천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초당 이명익(1617~1687)   (0) 2011.12.13
간재 이덕홍(1541~1596)  (0) 2011.12.12
노송정 이계양(1424~1488)  (0) 2011.12.10
간재 변중일(1575~1660)  (0) 2011.12.10
임연재 배삼익(1534~1588)  (0) 201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