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청계 김 진(1500~1580)

자즐보 2011. 12. 10. 11:14

 

청계(靑溪) 김 진(金璡,1500~1580)

의성 김씨는 동방 한국의 명망 높은 씨족이다. 고려 때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었는데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이고, 그 아들 의(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다. 자손들이 번성하고 빛나 5세(世) 뒤 공의 증조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휘 한계(漢啓)에 이르도록 다 높은 벼슬과 현달한 관인으로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 청계김진영정 (보물  제1221호)

  






































 

 

 

공의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휘 만근(萬謹)이고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휘 예범(禮範)인데

처음부터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공의 처(妻)는 영해 신씨(寧海申氏) 군수(郡守) 명창(命昌)의 딸이다.

공의 휘는 진(璡), 자는 형중(瑩仲)이다. 나면서 재능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알았다.

큰 고모부 권간(權幹) 공은 가행(家行)이 있어 효제로부터 사람을 가르치니, 공이 열다섯 살에

곧 나아가서 배웠다. 성인이 된 뒤에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민씨의 계부(季父)는 세정(世貞)으로 중종때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한 기묘(己卯) 명유(名儒)이다.

공이 또 따르고 배워 당시의 여러 군자들이 논하는 경륜(經綸)을 듣게 되니, 이로부터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기예(技藝)와 학업이 매일 진보(進步)하였다.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가서 상사(上舍: 進士)에 합격하니 갈수록 더 진취하여 동료들의 추대를 받았다. 곧 과거 공부를 버리고 돌아와 임하현의 부암(傅巖)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후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서당을 열어 자제들과 고을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과정을 마련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이끌어주고 가르쳐주기를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하니, 학도들이 점점 많아지고

글 읽는 소리가 고을에 가득했다.

공의 다섯 아들 중 셋이 대과에 급제하고 두 사람은 상상(上庠: 성균관)에 오르니 다 공이 강건할 때이므로 큰 영광이 되었으며, 세시(歲時)마다 근친(覲親)했을 때 번쩍이는 홀(笏)이 상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이 칭찬하고 흠모하며 감탄하였다. 처음 공이 태어났을 때 진사공이 특별히 사랑하면서 자를 문회(文會)라고 지어 주고 말씀하시기를 ‘이 손자가 반드시 우리 가문을 창성하게 할 것’ 이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이 평상시 두 어버이를 받들면서 매우 조심하여, 춥고 따뜻함을 살피고 음식을 성품에 알맞게 받들어 즐겁게 하는데 힘썼고, 상(喪)을 당하여는 슬픔을 극진히 하여 묘려(墓廬)에서 삼 년을

지냈다. 동생과 누이에게 우애를 독실히 하였고 재산을 나눔에 있어서 문서를 만들지 않았으며,

가정에 흠잡는 말이 없었다.

생질(甥姪)을 기르는데 자기 자식같이 하였고, 가난하여 장가들고 시집가지 못하는 이에게 힘써

주선하고 필요한 물자를 보내 주었다. 제사에는 더욱 정성을 들여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안팎에서 떠드는 소리가 없도록 경계하고, 제삿날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제사를 받들었다.

늘 말하기를 “제사를 삼가지 않으면 조상께서 흠향(歆饗)하지 않으신다. 또한 사람이 집이 흥(興)하고 침체(沈滯)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음사(淫祀)나 잡귀(雜鬼)를 섬기는 일은 통분히 여기고 미워하여 마치 더럽혀 지는 듯이 하니,

무당들이 감히 마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고을 남쪽 산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염흥방(廉興邦)이 그 귀신이라 하며 무당들이 요망한 말로 속이고 유혹하였다.

공이 달려가서 꾸짖기를 “니가 전조(前朝: 고려)의 간악(奸惡)한 무리로서 죽어도 죄가 남아 용서받을 수 없거늘, 신령스럽지 못한 귀신으로서 백성들을 요혹하는가” 하고 헐어버리니 좋지 못한

풍속이 조금 안정되었다.

늘 여러 벼슬하는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신임을 보이는 것으로써 우선한 뒤에 간하여 받아들이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바른 도리로써 죽을지언정 도를 굽혀 사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았다고 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었다고 보겠다”하였다.

만년에는 영해의 청기현(靑杞縣)에 가서 그 굽이진 산과 감싸 도는 물을 사랑하며,

밭 갈고 낚시하는 즐거움이 있으므로, 가족을 이끌고 가 살았다.

종자(從者)들과 함께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써 자급자족하였으며, 늘 좋은 때와 명절을 만나면 누른 닭과 흰 술로 시골 늙은이와 벗들을 불러 모아, 서로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술이 몇 순배 돌면 곧 활쏘기를 하는데 먼저 깍지(決拾)를 끼고 짝을 불러 동안학발(童顔鶴髮)에 환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쏘면 반드시 적중하므로, 한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놀라며

지선(地仙)이라 하였다.

운명(殞命)할 때 태연한 얼굴로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하늘이 나에게 후한 복을 누리게 하였다. 또 무엇을 구하리오”하였다.

공은 홍치(弘治) 경신(1500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경진(1580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임하현 동쪽 경출산(景出山) 진향(震向) 터에 민씨(閔氏)와 전후봉(前後封)으로 장사(葬事)하였다. 민씨는 고(故) 좌정승 제(霽)의 5대손 병절교위(秉節校尉) 세경(世卿)의 딸이며, 부인(婦人)의 도리를 매우 잘 터득했고, 공보다 34년 먼저 별세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12년 임진년에 공의 아들 성일(誠一)이 경상우도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가 되니, 추은(推恩)으로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의 증직(贈職)이 내려졌고, 민씨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의 증직이 내려졌다.

공의 조부와 아버지에게도 다 법에 따라 증직이 내려졌다. 또 14년 뒤 병오(丙午)에 조정에서는

성일(誠一)이 왜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므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일등(一等)에 녹훈(錄勳)하고, 공에게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의 증직을 더하였다. 아! 공의 영광이 이에 이르러 더욱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큰아들 극일(克一)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인데 시로써 이름이 높았고, 다음 수일(守一)은 성균 생원으로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고, 다음 명일(明一)은 성균 생원으로 일찍 죽고, 다음 성일(誠一)은 덕행(德行)이 있으며 이룬 업적이 있어서 후학들이 학봉선생(鶴峯先生)이라고 일컫는다.

막내 복일(復一)은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이며, 큰딸은 류성(柳城)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다음 딸은 성균관 직강(直講) 이봉춘(李逢春)에게 출가하였고, 끝은 류란(柳瀾)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자(庶子) 연일(衍一)과 서녀(庶女) 둘이 있다. 내외손 증손 남녀 백여 명이 있다.

白雲亭(백운정)
鑿壁開亭翠?頭(착벽개정취헌두) 절벽을 깎아 지은 정자 푸른 산머리
江山明媚拂人眸(강산명미불인모) 강산이 아름다워 눈에 산뜻해
日臨鏡面魚紋動(일임경면어문동) 햇살 쬐는 물 위엔 노니는 고기
雲掃天心雁字稠(운소천심안자조) 구름 걷힌 하늘을 가는 기러기
百里遊歌曾物色(백리유가증물색) 고을원님 유가(遊歌), 이곳을 찾아 주시니
一區花草亦光休(일구화초역광휴) 이 구역의 화초들도 영광스럽네
樽前知有無窮樂(준전지유무궁락) 잔 들고 한없이 즐기고는 있지만
祗恐兒孫醉似劉(지공아손취사유) 자손들 유영(劉伶) 같이 취할까 두렵구나.

* 백운정 정자 앞에 부암(傅巖)이 있는데, 이때 수령이 놀러왔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준 일을 언급한 것이다.
* 고을원님: 고을원님은 사방 백리를 맡아 다스린다하여 “백리(百里)” 라고도 한다. 유가(遊歌)란,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豈弟君子(기제군자) 來遊來歌(래유래가)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군자가 정서 함양을 위해 노닐고 노래하는 것을 말함.
* 유영(劉伶): 중국 위(魏)나라 패국(沛國)사람. 자(字)는 백륜(伯倫).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너무 좋아하여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다. 혜강(?康), 완적(阮籍) 등과 죽림지교(竹林之交)를 맺었다. 고문진보에 실린 그의 “주덕송(酒德頌)”이란 글이 유명하다.
* 부암(傅巖):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 백운정 아래에 있는 바위, 또는 그 일대를 말함. 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을 도와 중흥을 이룩했던 현상(賢相:어질고 뛰어난 재상) 열(說)이 숨어 살았던 지명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종이 그를 꿈에서 만난 뒤 부암(傅巖)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그를 찾아 발탁하여 부열(傅說)이라 불렀던 고사가 있은 뒤로 “부암(傅巖)”은 인재의 은거처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 의성김씨 종택, 16세기에 소실된 것을 청계 김진의 4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16세기 말

사신으로 북경을 갔을 때 그 곳 상류층의 주택 설계도를 가져와 지은 것이다.(보물 제450호)

 

▼ 백운정,청계 김진의 차남 귀봉 김수일이 아버지에게 땅을 물려 받아 선조 1년(1568년)에

세운 정자로 반변천 건너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마을과 마주 보고 있다.

(경북문화재자료 제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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