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靑溪) 김 진(金璡,1500~1580) | ||||
의성 김씨는 동방 한국의 명망 높은 씨족이다. 고려 때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었는데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이고, 그 아들 의(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다. 자손들이 번성하고 빛나 5세(世) 뒤 공의 증조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휘 한계(漢啓)에 이르도록 다 높은 벼슬과 현달한 관인으로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공의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휘 만근(萬謹)이고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휘 예범(禮範)인데 처음부터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공의 처(妻)는 영해 신씨(寧海申氏) 군수(郡守) 명창(命昌)의 딸이다. 큰 고모부 권간(權幹) 공은 가행(家行)이 있어 효제로부터 사람을 가르치니, 공이 열다섯 살에 곧 나아가서 배웠다. 성인이 된 뒤에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민씨의 계부(季父)는 세정(世貞)으로 중종때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한 기묘(己卯) 명유(名儒)이다. 공이 또 따르고 배워 당시의 여러 군자들이 논하는 경륜(經綸)을 듣게 되니, 이로부터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기예(技藝)와 학업이 매일 진보(進步)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고을에 가득했다.
공이 평상시 두 어버이를 받들면서 매우 조심하여, 춥고 따뜻함을 살피고 음식을 성품에 알맞게 받들어 즐겁게 하는데 힘썼고, 상(喪)을 당하여는 슬픔을 극진히 하여 묘려(墓廬)에서 삼 년을 지냈다. 동생과 누이에게 우애를 독실히 하였고 재산을 나눔에 있어서 문서를 만들지 않았으며, 가정에 흠잡는 말이 없었다. 주선하고 필요한 물자를 보내 주었다. 제사에는 더욱 정성을 들여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안팎에서 떠드는 소리가 없도록 경계하고, 제삿날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제사를 받들었다. 늘 말하기를 “제사를 삼가지 않으면 조상께서 흠향(歆饗)하지 않으신다. 또한 사람이 집이 흥(興)하고 침체(沈滯)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당들이 감히 마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고을 남쪽 산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염흥방(廉興邦)이 그 귀신이라 하며 무당들이 요망한 말로 속이고 유혹하였다. 공이 달려가서 꾸짖기를 “니가 전조(前朝: 고려)의 간악(奸惡)한 무리로서 죽어도 죄가 남아 용서받을 수 없거늘, 신령스럽지 못한 귀신으로서 백성들을 요혹하는가” 하고 헐어버리니 좋지 못한 풍속이 조금 안정되었다. 살았다고 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었다고 보겠다”하였다. 밭 갈고 낚시하는 즐거움이 있으므로, 가족을 이끌고 가 살았다. 종자(從者)들과 함께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써 자급자족하였으며, 늘 좋은 때와 명절을 만나면 누른 닭과 흰 술로 시골 늙은이와 벗들을 불러 모아, 서로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술이 몇 순배 돌면 곧 활쏘기를 하는데 먼저 깍지(決拾)를 끼고 짝을 불러 동안학발(童顔鶴髮)에 환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쏘면 반드시 적중하므로, 한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놀라며 지선(地仙)이라 하였다. 성일(誠一)이 왜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므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일등(一等)에 녹훈(錄勳)하고, 공에게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의 증직을 더하였다. 아! 공의 영광이 이에 이르러 더욱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막내 복일(復一)은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이며, 큰딸은 류성(柳城)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다음 딸은 성균관 직강(直講) 이봉춘(李逢春)에게 출가하였고, 끝은 류란(柳瀾)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자(庶子) 연일(衍一)과 서녀(庶女) 둘이 있다. 내외손 증손 남녀 백여 명이 있다.
▼ 의성김씨 종택, 16세기에 소실된 것을 청계 김진의 4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16세기 말 사신으로 북경을 갔을 때 그 곳 상류층의 주택 설계도를 가져와 지은 것이다.(보물 제450호)
▼ 백운정,청계 김진의 차남 귀봉 김수일이 아버지에게 땅을 물려 받아 선조 1년(1568년)에 세운 정자로 반변천 건너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마을과 마주 보고 있다. (경북문화재자료 제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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