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향교
조선 숙종 9년(1683년) 건립/경북문화재 자료 제75호
『영양군지』를 통해보면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전루, 육영루, 교사를
재사와 주고를 건축하였다고 하였다.『경북향교지』에서는 1683년(숙종9)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1925년 육영루가 철거되었고 2009년 현위치에 복원하였다.
현재 영양향교는 대성전과 내삼문, 두 개의 협문과 명륜당, 육영루, 전사청, 관리사 및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육영루(育英樓)
육영루 뒤 명륜당 그리고 대성전
수월헌(水月軒)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충효로서 널리 알려진 수월(水月) 조검(趙儉)선생의 정자다.
선생은 선조 3년(1570)에 원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소학을 배울 때 고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들으면
심중에 즐겨하고 모방코자 노력하였으며 차차 장성하여
인륜을 두렵게 지키며 언행이 공손하였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오랫동안 부모를 받들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겼는데, 조모가 겨울에 병상에서
강어(江魚)를 원하였다. 그러나 얼음이 강을 덮어 구하기가 어려워
울며 강 아래 위를 수차 내왕하면서
"부친이 평시에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셨으니
영검이 계신다면 고기를 구하도록 하여달라"고 애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오르고 또 그것을
까마귀가 물어 선생에게 날라주어 그 잉어를 가져와 조모에게
공궤(供饋,받들어서 먹게하는 것) 한즉 병이 나았다.
이에 모두 효성이 신명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선생의 충효를 추앙하기 위하여 후일에 자손들이 지은 정자이며
세 칸 겹집으로 左右書室(좌우서실)이며 중간은 마루로서 좁고 난간을 둘렸다.
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하였다.
연못, 올챙이들의 유희(遊戱)
375년을 살아 온 향나무(보호수)
병자호란(1636년) 때 조검선생이 심은 향나무이다.
사의정사(思義精舍)
사의정사(思義精舍)는 한양 조씨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趙源)의 종택으로
350년 전에 건립되었으나, 2002년에 기존의 종택을 철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중건하였다.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은 기묘사화(1519)를 만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한양조씨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감공 조종(趙琮)은 영주로
그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은 1535년 경북 영양에 입향하면서
한양조씨의 영양세거가 시작되었다.
한양조씨 11세 손으로 영양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 선생은
안동 풍산 땅에서 영양으로 들어와 함양 오(吳)씨를 맞아
光仁(광인), 光義(광의) 두 형제를 두었다.
한양조씨 12세 손인 광인(1537~1582)에게는 검(儉)과 임(任)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자 검은 조실부모 후 병든 조모를 구완하기 위해 빙판 위를 오르내리며
잉어를 구한 이야기로 마을 이름이 비릿골(飛鯉里)로 불리울 만큼 유명하였으며,
효행으로 향내(鄕內)에 널리 알려져 향인들의 추앙하는 바 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생 임과 함께 홍의장군 곽망우당
(郭忘憂堂) 휘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조검의 아우인사월공(沙月公) 조임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 조검과 함께 의령출신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웠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27년 정묘호란때는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바쳤으며
1636년 병자호란때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했다.
참판공종택이란 글을 새긴 돌과 "한양조씨영양입향시조추모비"
한양조씨영양세거기념비
한양 조씨 영양 입향 내력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대략 한양 조씨는 참판공 조원의 뒤를 이은
水月(수월), 沙月(사월), 壺隱(호은)을 거쳐 지훈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날린 명문세가라는 내용인 듯...
영양 사정(思亭)
일제강점기 때 자선사업가 대은 권영성(1881~1959년)
선생이 1934년 건립한 정자.
연소정(蓮沼亭)
연소정은 영양읍 감천리에 있는 연소정은
1584년(선조 17년)에 칠원현감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를 지낸
칠원 오시준(吳時俊)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고려조에 삼사좌윤을 지낸
시조 낙안군(樂安君)의 6세손이며 중종조 어모장군별시위(御侮將軍別侍衛)인
원로(元老)의 아들이다.
선생은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1579년(선조 12년)
창주진관구병마첨제사를 제수 하였다. 1584년(선조 17년)에 칠원현감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만년에 소일하고 거처하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자손들이 수차 중수하였으나 퇴락 하여 1960년 중건하였다.
이 정자는 좌우로 무이산(武夷山)과 취소산(吹嘯山)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수십 척의
암석이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이 절벽은 군내 유일한 천연기념물인 측백수림이 울창하며
봄과 여름에는 진달래, 철쭉, 개나리꽃이 만발하며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경치를
더 한층 아름답게 한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그 깊이가 수십 척이며
강가에는 춘추로 수석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정자 아래는 옛날에 온천이 있었다 하여 감천이라 마을 이름을 지었다하나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강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천렵하는 사람과 낚시질하는
태공들이 끊이지 않는다. 안동으로 통하는 대로가 정자 위에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정자의 규모는 연소정기가 있고 연소정이란 현판이 마루 안팎으로 두 곳에 개편되어 있다.
이 마을은 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하여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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