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문화·유적지

안동의 설화

자즐보 2010. 11. 21. 07:01

 

大師(대사)가 꽂은 지팡이 임동면 마령리의 당나무


옛날 임동면 마령리에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씨만은 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노인 내외는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세월이 흘러 며느리를 보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 역시 마음씨가 곱고 효성이 지극하여 시부모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으나

워낙 집이 가난 하고 빈약하여 아들 내외의 노력으로는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백발이 성성한 대사가 나타나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였지만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하였더니 "이 집 식구 중에 호식할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있구료." 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 말을 들으니 가난한 살림에 한 가지 걱정이 더해 집안은 늘 수심에 잠겼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으며 오직 아들 내외는 부지런히 일하고 부모를 더욱 극진히 모셨다.


이듬해 정월 대보름이 되어 시어머니가 이르기를 마을에 있는 세 곳의 우물물을 가장 먼저 길러다가 오곡밥을 지어먹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며 며느리에게 물을 길러 오게 했다.

며느리는 새벽 일찍 일어나 첫 번째 우물과 두 번째 우물에서 물을 길러 날랐다. 마지막 세 번째 우물로 물동이를 이고 갔다가 그만 호랑이를 만나 까무러치고 말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깊은 산 속의 동굴이었다. 호랑이가 말하기를

"내 눈에 네가 개로 보였으면 벌써 잡아 먹었을 텐데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 너는 분명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 듯하니 내가 잘못 물어왔나 보구나."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던 일을 시어머니께 말하자, 시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에 점이라도 쳐보려고 대문을 열고 나서자 거기엔 전에 왔던 대사가 서있었다. 시어머니는 전에 대사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보리쌀 많이 시주하며 며느리의 일을 대사에게 이야기하고 대책을 호소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사는 짚고 섰던 지팡이를 마당 한가운데 에 꽂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자 이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나고 자라기 시작했다.


하도 신기하여 이 집에서는 이 나무에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렸더니 가세가 점점 나아져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공양을 바치고 빌기를 다투어 하더니 이 나무가 크게 자라고 난 후에는 일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에 큰제사를 지내게 되면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마령리 당나무다.

 

 

 

허수아비가 공민왕을 살린 곳 풍산읍 수동의 국신당 전설


풍산읍에서 6㎞ 지점에 지금은 다 헐려 조그만 1간 남짓한 성황당이 있는데 이를 국신당이라 한다. 옛날에 이곳은 대나무 밭과 팽나무가 무성했으나 지금은 찾아 블 수 없으며 매년 정월보름날 이 고장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서 하던 별신굿도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또한 국신당에 모신 공민왕의 영을 위로하던 놋부처도 갑술년 대 흥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국신당은 60여년 전 세워진 것으로 공민왕이 흥건적을 피해 이 지방까지 피난을 왔을 때의 일로부터 시작된다. 공민왕은 쫓기는 형편이어서 뒤따르던 신하들의 수가 하나 둘씩 날이 갈수록 줄게 되었으며 이곳 풍산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 6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급한 공민왕은 풍산 동쪽 상리동 산 정상에 허수아비 병정을 곳곳에 세우고 남으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마침 이 때가 가을철이라 아침 안개가 끼어 공민왕을 쫓던 도적의 무리가 산 위를 보니 적군을 한눈에 집어삼키려는 기세로 많은 군사가 아래쪽을 향해 활을 쏘는 형용을 하기에 겁에 질린 적군은 후퇴하였다 한다.


공민왕은 이곳 무성한 대나무 숲에서 휴식을 취하여 무사했었다하여 이것을 기려 마을 사람들은 국신당을 제워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한편 조선 중엽에 이 마을에 권사도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말 잘타고 활을 잘 쏘아 그 무술이 천하일품이었다.


어느 날 이 수동마을에 어디선가 종일 하늘을 울리는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권사도 청년이 용마를 달래 보겠다고 나섰다. 권사도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려나가 낙동강 어귀 깊은 웅덩이 옆 큰 바위 위에서 울고 있는 용마에게 다가갔다.


신통하게 용마는 권사도가 가까이 오자 울음을 그쳤다. 사도는 용마를 집어타고 위풍당당하게 마을로 돌아왔다. 사도는 용마를 길들이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몇년 뒤 왜란이 일어나자 사도는 용마를 타고 출전하였다. 마을을 나가려는데 국신당 앞에서 말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뜻밖의 변고에 술렁거렸다. 그러자 권사도는 [국신당을 돌보지 않아 신주가 노하신 것입니다. ]하며 국신사로 들어가 지성을 다하며 열심히 빌었다. 그러자 말의 발이 떨어져 전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사도는 떠나면서 국신당에 지성을 드릴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당부하였으며 후일 큰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의 자리에 올랐다 한다.


마을에서는 국신사 사당을 재건하여 정월 대 보름날에는 수동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인근 5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사당 앞에서 굿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굿을 수동별신굿이라 하며며 400여년간 계속되고 있다.

 

 

 

도깨비가 정해준 정자터


옛날 풍산 고을 개평리에 글읽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마음씨 좋은 배감사<裵桓(배환)>이라는 분이 살았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여러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강 건너 서쪽 단호리의 기암절벽은 지는 석양을 받아 한 폭의그림 처럼 아름다웠다.


 

강둑을 거닐며 풍월을 좋아하는 배감사는 이 좋은 풍경을 배경삼아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술도 거나하게 취한 터라 배감사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가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에 깨끗한 백사장을 베개 삼아 배감사는 갑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 때인가 시원한 강바람에 산책을 나왔던 도깨비들이 잠이 든 배감사를 보았다. 도깨비들은 배감사가 죽은 줄로만 알고 불쌍하게도 배감사가 죽었다 하며 장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도깨비들은 배감사를 메고 강물을 건너 가파른 절벽을 오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절벽을 오르던 도깨비들은 힘이 들어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그중에 한 도깨비가

[여기가 좋은 묘터가 되겠는걸. 우리 여기서 장사 지내는 게 어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잠에서 깬 배감사는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너무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다른 한 도깨비가[아니야, 여기는 좋은 정자터지, 묘터가 아니야.]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죽은 체 듣고만 있던 배감사는 죽을 힘을 다해[네 이놈들, 뭣하는 짓들이야? 내가 죽긴 왜 죽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놀란 도깨비들은 정신없이 절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소동에 절벽 위에서 집채같은 커다란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에 알맞은 터를 닦아 놓았다.


도깨비들에게 좋은 정자터를 얻은 배감사는 여기에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군 남후면 단호리, 굽이치는 낙동강가 깎아지른 듯한 단애 아래 낙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하여 落巖亭(낙암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호랑이가 잡은 묘터 虎岩(호암)의 유래


안동신 녹전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킬로미터 되는 곳에 '호암'마을이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조금 가다보면 집채만한 바위가 여러 덩이 있고, 산간 분지에 십여 채의 인가가 옹기종기 모여 자리를 틀고 있다.


옛날, 가난한 농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외동아들을 데리고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인심이 있고 착한 내외와 예의범절이 지극하고 효성이 있는 아들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그 가정은 산새와 들새들이 우짖지는 외딴 산골 오두막집이었지만 매일 웃음꽃이 활짝 피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 인자한 할아버지도 나이가 많은 탓으로 병석에 눕게되었다. 처음에 할머니와 아들은 괜찮으려니 하고 집안 일을 하면서 할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렇지만 1년이 가고 2년째 되는 어느 겨울, 할아버지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곧 숨을 거두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외동아들은 아버지의 노환을 고치기 위해 두루 알아본 바, 아주 먼 마을에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들은 개나리 봇짐을 지고 약을 구하러 길을 나섰다. 산골을 몇 개 지나고, 고개를 여러 번 넘어, 떨어져 있는 낙엽을 밟으면서 쉴 새 없이 걸음을 재촉하여 약을 구해 다시 집으로 돌아 올 때는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짙어오고 있었다.


어둠이 어느덧 짙어져 달빛이 겨우 길을 인도할 지경이었다. 그 아들은 달빛에 어린 자기 그림자를 친구 삼아서 어떤 산 고개를 넘는 중, 갑자기 고갯마루에서 집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자기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혼비백산한 아들은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자기를 단숨에 잡아먹으려고 호랑이가 달려들지 않아, 겨우 정신을 수습해 호랑이를 보니, 산중 왕 닫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안심이 된 아들이 조심조심 호랑이 곁으로 가니 호랑이가 끙끙대며 더 아가리를 크게 벌리는 거였다.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용기를 내어 목구멍을 들여다보니 긴 비녀가 목구멍을 가로질러 박혀 있었다.


비로소 전후사정을 안 아들은 목에 걸린 비녀를 빼주었다. 그 호랑이는 낮에 어떤 여자를 잡아먹다 그만 비녀가 목에 걸린 거였다.

호랑이는 너무나 고마워서 은혜를 갚기 위해 먼길을 더 가야 할 아들을 그의 등에 태우고는 단숨에 달렸다. 그러나, 아들이 애써 약을 구해온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고만 것이었다.


슬피 우는 아들을 두고 산으로 돌아갔던 호랑이가 장례 날에 나타나 무조건 아들을 등에 태우고는 깊숙한 산 속으로 냅다 달리는 것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호랑이가 양지바른 산자락한 곳에 서더니 아들을 내려놓았다. 그 터는 누가 보기에도 좋은 묘터였다. 호랑이의 고마운 뜻을 짐작한 아들은 호랑이가 잡아준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셨다.


그 후,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발복하여 살림이 나아지게 되었고, 자자손손 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호랑이가 잡아준 묘터가 있어서 호랑이 '범'자를 따고, 바위가 많은 산골이라 하여 '범바우' 즉 '虎岩(호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가산 도사

옛날 학가산(안동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에는 이름 높은 도사가 한 분 살고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놀기만 했다. 집에는 곡식 한 톨 없었다. 그가 굶어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서 동네 사람들이 가보았더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사는 저녁때가 되자, 부엌에 나가서 밥상을 들고 들어왔는데 놀게도 상다리가 휘도록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지?]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그 조화를 알 수가 없었다. 도사는 천천히 식사를 끝낼 뒤에 밥상을 들어다가 부엌에 네다 놓고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누웠다.

금방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도사가 먹다 둔 남은 음식을 훔쳐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가 보았다.
[어, 이게 어찌된 일이야?]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엌에는 음식커녕 먼지만 뽀야게 쌓여 있을 뿐 빈 밥상도 없었다.

다음 날 용기 있는 마을 젊은이들이 가서 물어보았지만 도사는 웃기만 할뿐이었다.
다음날, 그 다음 날의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풍기 희방사에도 도사가 한 분 살고 있었다. 이 도사 방에 풍기부자가 와서 화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홥니까?]
풍기 부자가 이야기를 했다.
[밥상을 다 차려 두면 밥상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없어졌던 밥상이 한 시간 쭘 뒤에는 음식을 다 먹은 채 부엌 제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벌써 몇 달째나 그래서 저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사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십시 오.]
[그래요? 누군가가 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풍기 도사는 웃었다. ]
[내가 이따가 댁에 가보지요. 어떤 녀석인지 내일부터는 그러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그날 저녁, 밥상을 차릴 즈음 희방사 도사가 부잣집 부엌에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밥상이 다 차려지자 밥상이 음틀거렸다.
그 순간, 희방사 도사가 밥상 위에 허공을 후려쳤다.
[아야! 웬놈이냐?]하는 소리가 나면서 밥상이 내동댕이쳐졌다.
희방사 도사는, [학가산 명인도사가 배가 고팠나 보군요.]하면서 희방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이들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전히 밥상이 없어졌다. 그래서 부자는 도사를 찾아 가서 직접 학가산 까지 가서 담판을 해보자고 했다. 부자와 희방사 도사는 학가산으로 떠났다.

학가산 도사가 어느 날, 식사를 하고 먼 곳을 보니 희방사 도사와 풍기 부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얼른 호랑이로 변신해서 그들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러나 희방사 도사도 곰, 사자 등으로 변신하면서 점점 가까이 왔다. 그 때마다 학가산 도사는 코끼리, 곰 등으로 변신하면서 그들이 학가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싸우다 지친 희방사 도사가, [이만 돌아갑시다. 이만 했으면 이제는 밥상을 훔쳐 가지는 않겠지요.] 라고 했다.

그러나, 풍기 부자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그렇지만, 아직도 모르니까, 우리가 왔던 흔적이라도 만들어 노고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계 의 했다. [그럽시다. 우리 여기에다 탑이나 하나 쌓아놓고 갑시다.]
둘은 커다란 돌을 주워서 돌탑을 쌓았다.

학가산 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은 이 탑의 이름을 따서 석탑등(塔泂)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아기장수의 죽음과 용마

 

옛날 어느 마을에는 송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가난하였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이라면 결혼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아기가 없는 것이 불행이었고 근심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차츰 걱정이 되었다. 이들 부부는 밤마다 목욕을 깨끗이 하고,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아들 하나 갖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하늘의 보살핌이었을까? 몇 년 뒤에 부부는 기다리던 옥동자를 얻게 되었다.


옥동자는 무럭무럭 자랐다. 보통 아이들보다 몸집도 크고, 자라는 속도도 아주 빨랐다. 두어 달이 지나자 벌써 걸어 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를 보고 이구동성으로,"하늘이 내린 보배야."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아들을 가운데 눕히고 잠이 든 부부는 밤중에 일어나보니 아들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아니, 이 밤중에 이 녀석이 어디 갔담?" 부부는 걱정이 되어서 아이를 찾았다. 집안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아들은 없었다. 아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태연하게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노? 이 밤증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꾸짖었지만 아이는 대꾸도 안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자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철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날이었다. 부부는 걱정이 되어서 잠든 척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정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아이는 어른처럼 태연하게 일어나서 옷을 입고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부부는 아들 몰래 뒤를 밟았다. 아이는 헛간에 들어가서 겨릅을 한 주먹 뽑아 들고는 골목을 나간다.


골목을 지나 곧장 강변으로 향했다. 아이는 들고 온 겨릅을 쥐어서 모래에 꽂았다. 겨릅은 금방 모두 군사들로 변해 버렸다. 장군이 된 아이는 군사를 풀어서 진지를 만들어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부부는 숨을 죽이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점점 두려워졌다. 두려움 때문에 끝까지 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부부는 돌아와서 자는 척하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아들은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방에 들어와서 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벌써 몇달이나 계속되었다. 부부는 생각하다 못해 마을 어른들께 이 사실을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어른들이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이의 행동을 몰래 확인한 뒤에는 모두 낮빛이 변했다.

"이거 큰일 났군. 역마살이야." 한 어른이 말했다. 아기장수는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되겠지만, 역모를 두려워하는 임금이 알면 어떤 벌이 내려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본인은 물론 삼족을 몰살하고, 또 마을에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 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했다. 마을에 미칠 화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부모와 일부에서는 반대했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이 아이를 죽이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부부는 안타까웠지만 마을 어른들의 결정인지라 어쩌지도 못하고 따르기로 했다. 새벽에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아이를 관에 넣고, 못질을 해버리면 관 속에 있는 아이는 죽을 거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 몰래 관을 만들어 놓고, 잠들기를 기다렸다.

곤히 잠든 아이를 관 속에 넣었다. 장정 여러 사람이 관 위에 올라서서 누르며 못질을 했다. 그러나 못이 자꾸만 굽어서 관 뚜껑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못을 박았다. 그러나 굽은 못 하나가 아이의 머리에 박히면서 아이는 그만 죽고 말았다.


아이가 죽는 순간,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서 울부짖으면서 아이의 머리에 박힌 못을 입으로 뽑았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혼을 다 잃었다고 한다.

제 정신을 찾아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모두들 자기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에 분통해 했다.


용마가 죽은 아이와 함께 사라진 뒤, 그 자리에는 바위가 하나 생겼는데, 그 모양이 독 모양의 바위와 뚜껑이 있어서 사람들은 독바위 라고 부른다.


이 독바위에는 아기장수의 갑옷과 투구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 시대에 일본인 순사가 이 독바위 뚜껑을 열어보려고 하다가 벼락이 쳐서 그만 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오고 있다.

 

 

 

바위로 변해버린 하녀


안동군 예안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큰 못이 하나 있다. 그 못은 800년 전에는 못이 아니라 큰 부잣집의 집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주인은 매사에 인색하기 짝이 없어 동리 사람들은 그를 돼지라고 불렀다.

 

하루는 그 집에 어떤 스님이 지나다가 그 부잣집 주인에게 시주를 좀 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주인 영감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우리 집에는 개 줄 것은 있어도 너 줄 것은 없다." 고 하였다.


그래도 스님은 시주를 해 줄 것을 부탁하였더니 주인 영감은 삽을 들고 마굿간에 들어가 말똥을 한 삽 떠다가 스님의 바랑에 낳어 주었다.

 

그래도 스님은 고맙다 하고 나가는데 마침 그 집 하녀가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스님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주인 영감 몰래 스님을 불러다가 곡간에 있는 쌀을 한 그릇 떠 바랑에 넣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쌀이 바랑 밑으로 모두 새어 흩어지고 말았다. 스님은 쌀을 하나씩 주우면서

"내일 아침 이 곳에 큰 홍수가 나서 이 집은 큰 못이 될 터이니 너는 내일 날이 밝는 즉시 이 곳을 피하여 됫 산으로 올라가되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올라가야 살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튿날 먼동이 트자 말자 하녀가 보따리를 싸 가지고 막 산으로 올라가는 데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고 천둥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하녀는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나서 허겁지겁 산을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스님이 한말을 생각하며 간신히 참았다.


산을 반쯤 올라갔을 때였다. 하늘이 째어지는 것 같은 천둥소리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돌아다 보고 말았다.

 

그랬더니 자기가 살던 집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커다란 못이 생겨져 있었다. 더욱 겁에 질린 하녀는 안간힘을 다해 산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발이 땅에 붙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만 하녀는 바위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 바위는 거기 서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망부석이라 부르고 있다.

 

 

 

보리를 다시퍼낸 작은며느리

옛날에 안동시 풍산읍 만운동에 권씨 성을 같인 두 형제가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다행히 살림은 넉넉해서 별로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어른이 되어 두 형제도 결혼을 하고 동생은 따로 살림을 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 제사며 조상 님들 제사를 모셔야하니 너는 그저 먹고살 만큼만 가져가라.]하면서 형은 겨우 논 두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를 동생에게 주어 세간을 네 보냈다.

 

매일 좋은 밥에 좋은 옷에 험한 일 한번 안 해보고 자란 동생은 조그만 밭을 가지고 일꾼을 부릴 수도 없어 손수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하는 농사일이라 고생도 고생이지만 수확을 해도 근근히 먹고 살 정도였다. 그래도 불평 없이 둘 내외가 부지런히 농사일에 매달려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 보리가 한창 수확이 되던 6월이었다. 작은며느리는 그 날도 남편을 따라 밭을 매러 나가면서 보리를 한 봉새기 퍼다가 큰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널어놓으면서 시어머니께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님, 혹시 비라도 올까싶어서 우리 집에 안 널고 이리로 가져왔어요. 비 오거던 힘 드시더라도 즘 거둬 주써요.]

[오냐, 그러마]


그런데 해가 지고 저녁때가 되어도 작은며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일을 많이 하는 모양이지? 시어머니는 멍석에 있던 작은 아들네의 보리를 퍼담기 시작했다. 그리다가 문득 그 곁에 널어놓은 큰 아들네의 많은 보리를 보고는 작은 아들네의 보리에다가 보태어 퍼 담아 넣었다.

 

[큰아들 내외가 보지 않으니 못사는 작은 것들에게 즘 보태주자].


그런데 부엌에서 저녁을 짓던 맏며느리가 우연히 이 광경을 보았다. 시어머니가 들어간 뒤 맡며느리는 작은며느리를 은근히 기다렸다.


아우 동서인 새댁이 저 보리를 어떻게 하는가 숨어서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일을 끝낸 작은며느리는 보리를 가지러 왔다. 보리 봉세기를 들어다 보니 보러가 아침에 가져올 때보다 훨씬 많았다.

 

하루종일 마르면 오히려 줄어야 할텐데 많이 불어나 있었다. 작은며느리는 그제야 시어머니께서 자기네를 위해 보태 놓은 것을 짐작하고 [에이고, 어른도 참!] 하면서 바가지로 큰 집 보리 그릇에 도로 퍼 넘기고는 아침에 가져 온 양만큼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숨어서 보던 큰며느리는 [지린 사람을 내가 못 알아봤구나. 새댁은 너무 착한 사람이구나.] 하며 마음이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며칠 후, 큰며느리는 시동생을 불렀다.

 

[새 서방님, 내일 모래가 형님 생일인 것 아시지요?]

[아참, 그렇지요?]

[장을 봐와야 하는데 제가 돈을 줄 테니 새 서방님이 사온 양 꼭 비싼 살코기만 사오지 마시고 그저 터부룩하게 많이만 사오세요. 아셨지요?]

 

동생은 그저 형수가 시키는 대로 정말 터부룩하게 많이만 사왔다. 그러자 형수는 자기 남편인 형에게 가서

[저, 여보. 당신 생일이라고 글쎄 새서방임이 장을 푸짐하게 봐오쎴네요. 살기도 힘드는데 정성이 너무 기특하네요. 생일날엔 이웃들 청해 다가 함께 먹어야겠어요.]

 

[거 참 고맙군. 당신 좋을 대로하구려.]

 

그래서 생일날엔 마을 사람들을 청해 다가 한껏 잔치를 벌였다. 손님도 다·가고 난 뒤 형수는

[이젠 우리 식구들끼리 이야기도 하며 두 형제분이 주고 받아 보세요.] 정답게 잔을 들어 자꾸 자기 남편에게 더욱 많이 술을 권하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많이 먹으면 취하는데.]

[아! 취하면 어때요. 우리 집인데 주무시면 될 일이지.]

 

마누라가 권하는 대로 마시던 형은 네활개를 활짝 펴고 코를 골며 잠이 들게 되었다.


형수는 자기 남편의 허리 끝에 채인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끄집어내어서는 고방에 숨겨놓은 궤짝을 열어 땅문서를 한 뭉치 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궤짝문도 안 닫고 주머니 끈도 그냥 두고 열쇠도 방바닥에 그냥 두었다.


한참을 자고 난 형이 술에서 깨에나 물을 찾았다. 형수는

[원! 그렇게 취하셨어요? 이제 정신이 드세요?]하며 냉수를 떠 바치었다. 물을 다 마신 형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 궤짝 문이 외 열렸지? 열쇠는 왜 여기 있노?}하는 것이었다.

[저런! 술이 취하면 저렇게 정신이 없는가. 자기 손으로 저 궤짝 문을 열어 땅문서 한 뭉치를 동생을 주어 놓고선...]

 

[내가 그랬나? 어리둥절하구먼. 어디 좋은 것 안 내줬나?]하고선 뒤져보니 앙지들 좋은 땅문서가 없다.


[허! 아까운 것을 다 주어 버렸네. 술이 폐단이다. 그참! 도로 가져 오래나 어쪄노? 그레 동생에게 주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그래서 동생은 형수덕에 재산의 반을 얻어 잘 살게 되었다.


그 후 두 형제는 더욱 부자가 되었고 우애 있게 평생을 잘 살았다. 작은며느리의 정직한 마음씨가 형수의 마음을 감동시켜 두 집이 서로 큰복을 누리게된 것이다.  

 

 

마뜰의 전설

옛날 지금의 성곡동 어느 마을에 마씨 성을 가진 한 노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30이 훨씬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늘 슬픈 일만 생겨 매우 불행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릴때 부모님이 돌아 가셨기 때문에 철들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 왔으나 항상 무슨일이 생겨서 조금도 돈을 모을 수가 없고 나쁜일만 닥쳐왔습니다.


그래서 마총각은 몹시 슬프고 실망하여 사는 것을 포기하고 슬픈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밤, 선어대에 가서 물에 빠져 죽기로 했습니다.

신을 벗어 놓고 깊고 푸른 물에 풍덩 뛰어 들려는 순간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으며,

"아까운 목숨인데 어찌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합니까? 무슨 사연이 그토록 슬퍼서 죽으려하는지 그 사연을 좀 들어봅시다." 하며 한 아름다운 여자가 총각을 붙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씨 총각은 자기의 슬픈 사정을 그 여자에게 상세히 말하고 살아 봤자 고생만 더할 뿐이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울먹였습니다.

그 말을 듣던 여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총각의 사연을 들으니 정말로 딱하고 동정이 갑니다. 만일 총각이 죽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루고 내 청을 하나 들어주면 나도 또한 총각의 청을 무엇이든 꼭 한가지 들어주어서 행복하게 해 줄터이니 내 말을 들어주겠어요?"하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총각은 그 여자의 소원과 부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죽기를 뒤로 미루고 한번 모험을 해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보고 "당신은 누구이며 당신의 부탁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총각 눈에 사람으로 보이는 나는 사실은 이 선어대 물 속에 사는 천년 묵은 큰 이시미(아주 오래된 구렁이) 입니다. 그간 많은 공덕을 쌓은 덕으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때가 벌써 지났는데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또 하나의 천년 된 이시미가 여기서 얼마 멀지 않는 임하쏘에 살고 있읍니다. 그와 나 둘 중 하나 만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갈 수 있는데 내가 가면 그가 못 가고, 그가 가면 내가 못가기 때문에 우리는 약 백년간이나 서로 싸우고 있으나 아직까지 승부가 나지 않아서 둘 다 끝없는 싸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각이 나를 도와서 싸움에 이기게 해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가게만 해주면 총각의 소원은 무엇이라도 꼭 이루어지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슨 재주로 그 싸움을 도울 수가 있겠어요? 나는 그런 큰 힘과 재주가 없어요."하고 총각은 자신 없이 말했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나와 임하쏘의 이시미가 싸울때 [청용이 이긴다.] 하고 소리쳐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임하쏘의 이시미에게 이겨 청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임하쏘에 이시미는 영원히 이시미로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둘이서 죽기를 무릅쓰고 정신없이 싸울때 [청용이 이긴다.]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정말인줄 알고 그쪽을 바라볼 때 임하쏘 황용의 급소를 쳐서 순간적으로 이기고 즉시 하늘로 올라가서 용이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틀 후 정오에 또 한 차례 싸움이 있습니다. 꼭 나를 도와주기 바랍니다."하고 간곡히 말을 했습니다.

총각은 그 말을 듣고 생각을 했습니다. '죽는 거라면 언제라도 죽을수 있으니 죽는 것을 뒤로 미루고 이 청용이 시키는대로 한번 해보자, 그러하면 혹시 지금까지 없었던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 보겠다고 용에게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약속한 2일 후, 처음 청용을 만났던 언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상쾌하였습니다. 흐르는 물은 맑고 투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정오가 되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강가에 모래와 잔돌들이 바람에 휩쓸리고 하늘은 먼지와 비구름으로 덮혀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며 번개가 치고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나며 청용과 황용이 물기둥을 일으키며 하늘로 물 속으로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리며 물고 할키고 부등켜 안고 싸우는데, 부딪칠 때마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번갯불 때문에 눈을 뜰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무섭고 겁이 나서 그만 총각은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총각이 눈을 떠보니 전에 보았던 그 여자가 조용히 옆에 서서 말을 했습니다.

"남자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 무엇해요, [청용이 이긴다]고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될텐데, 무엇이 어려워서 그 말 한마디도 못해요."하면서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잘 하겠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하고 총각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다음에는 틀림없이 잘해야 해요.

만일 다음에도 또 잘못하면 내가 총각을 혼내줄거예요."하고 그 여자는 무서운 눈으로 총각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5일후에 또 한 차례 싸움이 있을 터이니 실수없이 잘하라는 말을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총각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만일 청용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청용에게 벌을 받게 되니 있는 힘을 다하여 청용이 시키는대로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드디어 또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총각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또 겁이 나서 실수를 할까봐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 선어대 쏘로 나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가고 또 청용과 황용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지가 진동하고 뇌성 벽력이 납니다.

겁나기는 먼저번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총각은 용기를 내어 있는 힘을 다하여 하늘을 보고 눈을 꼭감은 채 "청용이 이긴다. 청용이 이긴다."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만 그 자리에 또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둡던 천지는 다시 밝아지고 비바람은 그치며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한참 뒤에 깨어난 총각은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밤 꿈에 선어대에서 만난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총각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총각 고마워요. 총각의 도움으로 나는 황용을 물리치고 어제 하늘로 올라와서 용이 되었어요. 약속한 대로 내가 이제는 총각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입니다. 무엇이든 소원을 말해보세요."


총각은 너무도 감격스러웠습니다.

별것도 아닌 자기의 작은 일이 이토록 청용을 기쁘게 해줄 줄은 몰랐습니다.

자기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재주란 농사 짓는일 밖에 없으므로 농사 지을 땅만 있으면 되고 집과 장가갈 색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청용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자기의 소박한 소원을 말했습니다.


청용은 그래 해주마, 하고 사라졌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였습니다.

꿈에서 용과 이야기한 그 다음날부터 많은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홍수가 나고 흙이 물에 씻겨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마들]은 옛날에는 가시 덤불과 돌 무덤으로 전혀 쓸모없는 땅이였습니다.

그러나 청용의 조화와 신통력으로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들판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홍수 때 집과 집 속에 있던 처녀도 함께 떠 내려오게 해서 마들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판은 마씨 총각의 농사 지을 들판이라고 널리 공포를 하였습니다.

총각은 이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용이 정해준 처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답니다.

 

 

 

하회마을의 팔푼도사

옛날 하회마을에 학식이 높은 정승이 계셨습니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일본 사람들의 침략으로부터 구하신 유성룡 대감입니다.


효성이 지극하신 유대감님은 정치를 하시다가 여가만 있으면 늘 고향인 하회마을로 와서 부모님과 여러 집안 어른들을 공경하셨습니다.


하회마을에는 유대감에게 아저씨 정도되는 좀 이상한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남들과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말도 잘 않으며 잠을 자거나 깨어 있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어느날에는 밤을 새워가며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어느날에는 하루종일 잠만 주무시는 날도 있습니다.


마을 뒷편 언덕위에 초막을 짓고 혼자서 살며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금 모자라는 바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은 그를 팔푼이라고 생각하고 [팔푼 도사]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어느해 겨울입니다. 설을 쉬려고 하회마을로 온 유대감 집으로 팔푼 도사가 새벽 일찍 찾아왔습니다.


먼길을 오느라 고단해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유대감의 침실로 막 들어가서 새벽부터 바둑을 두자고 합니다.


유대감은 바둑 실력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으며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몇째가는 고수급이였습니다.


잠도 깨지 않았는데 꼭두새벽에 침실까지 들어와서 바둑을 두자고 하니 정신이 멀쩡한 사람의 짓이 아니며, 또 그때까지 아무도 [팔푼 도사]가 바둑두는 것을 본 사람도 없으니 유대감의 상대는 본래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아저씨, 새벽부터 바둑은 무슨 바둑입니까?


고정하시고 노시다가 아침이나 잡숫고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팔푼 도사]는 정색을 하고 바둑을 꼭 두자고 대들었습니다.

 

어른을 공경하기로 유명한 유대감은 속으로 '이분이 정신이 실성해서 저러시는데 바둑을 둘 줄이나 아시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렇게 바둑을 두자고 하시니 대접조로 한판 해 드려야지......하면서 바둑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둑이 약 반판 정도 진행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유대감이 정신을 차려보니 유대감의 바둑이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유대감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나 결과는 유대감이 꼭 한집 지고 말았습니다.


"한판 더 두세." 하고[팔푼 도사]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겨야지!' 라고 결심한 유대감은 처음부터 정신을 차리고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나 이번에는 꼭 두집을 지고 말았습니다.

 

'그럴리가 없는데......'하면서 또 한판을 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꼭 세집을 지고 말았습니다.

[팔푼 도사]는 마치 승부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대감은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감은 [팔푼 도사]에게 큰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제가 미처 아저씨를 몰라 봤습니다."라고 하면서 공손히 머리를 숙였습니다.


[팔푼 도사]는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시더니 "대감, 오늘부터 약 100일 후에 어떤 중이 한 사람 대감집을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할 것일세. 그 중을 절대로 대감 집에서 재워서는 안되네. 무슨 핑계를 대든지 대감집에서 재우지 말고 내가 사는 초막으로 보내주게." 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 말씀하시는 태도가 무척 엄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되네. 꼭 명심하게."하고 나서 초막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유대감은 너무나 의외에 일을 당하여서 어리둥절하였으나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에게 앞으로 낯선 사람이 집에 와서 재워 달라고 청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알리라고 엄명을 하였습니다.


세월은 자꾸자꾸 흘러갔으며, 그 일이 있고 나서 꼭 100일째 되던 날 저녁 때였습니다.

어떤 젊은 중 한사람이 시주를 하러 왔다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재워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하인들은 즉시 대감에게 알렸습니다. 유대감은 속으로 크게 놀랐습니다.

[팔푼 도사]의 말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감은 여러가지 좋은 말로 집에서 재울 수 없다고 잘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은 방이 없으면 마루에서라도 마루가 없으면 헛간에라도 좋으니 꼭 하룻밤 재워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유대감은 도사에게 들은 말이 더욱 생각이 나서 끝까지 승낙하지 않고, 마을 뒷편에 있는 [팔푼 도사]의 초막으로 보냈습니다.


초막에는 방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은 먼길을 걸어 왔는 듯 자리에 눕자마자 곧 곤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잠자던 중이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떴습니다.

함께 자던 [팔푼 도사]가 중의 가슴 위에 올라 앉아 시퍼런 칼을 중 목에 대고 막 찌를 듯한 자세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중은 깜짝 놀라서 몸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어느새 손발 마저 묶여 있어서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선비님, 왜 이러십니까?" 하고 중은 겁에 질려서 말했습니다.

"네 이놈, 딴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네가 일본놈인 것도 나는 알고 있고, 염탐꾼인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유대감을 암살하려고 여기 온 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바른 말을 하지 않을 텐가?"하고 호령을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중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도사는 중 목에서 칼을 떼고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로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이요. 천지의 운세인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리 목숨 같은 너의 목숨 하나 뺏은들,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찌 멈출 수 있으리. 오늘 너를 살려서 보내주는 것도 모두가 하늘의 이치이다.


네 나라로 돌아가거든 네 나라 장수에게 하회 마을을 갔더니 무서운 도사가 있어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여라.


그리고 누구든 이 마을로 들어서는 일본군은 모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말도 꼭 전해라."하면서 중을 풀어 주었습니다.


중은 혼이 나서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과연 그 후 임진년이 되자 전쟁이 일어나서 온 나라 안이 모두 전란에 휩쓸렸습니다. 그러나 하회 마을에는 한 명의 왜병도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가시를 물어다 새끼를 죽인 계모 제비.


옛날 안동시 임하면에서는 상처를 하여도 전처 소생이 있는 경우에는 새 장가를 들지 않는 풍속이 있다.

 

그것은 전처 소생인 제비새끼를 죽게 한 후처 제비의 이야기 때문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제비 한 쌍이 강남에서 날아와 처마 끝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남달리 제비에게 관심이 많은 김생원은 제비집 밑에다가 널빤지를 달아주어서 제비들이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집을 다 지은 제비는 어느새 알을 낳고 새끼를 깠다. 어미 제비들은 먹이를 구해서 새끼들에게 먹이느라고 늘 분주했고, 그때마다 새끼 제비들은 노란 입을 벌리면서 어리광을 부리느라 요란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들의 움직임이 달랐다. 어미 제비는 늘 먹이를 찾아서 멀리까지 날아갔고 이때는 새끼 제비들도 조용했는데,

 

이날은 어미 제비가 계속해서 마당 주위를 맴돌고 있었으며, 새끼들도 계속 소란스럽게 우짖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어미 제비는 한 마리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한 마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어미제비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 나르기 시작했다.

 

새끼 제비들은 활기를 잃었는지 전처럼 요란하지도 않았다. 남은 어미 제비는 암놈인지 수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어미 제비가 두 마리로 불어났다. 그리고는 낯선 제비와 함께 먹이를 물어 나르는 것이었다.

 

그제야 김생원은 앞뒤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놈 제비가 상처를 하고 새로 암놈 제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이제 제비들은 안정된 새 살림을 꾸린 것 같아서 김생원은 안심을 했는데, 며칠이 안 가서 제비 새깨들이 자꾸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었다.


처음 한 마리가 죽었을 때에는 실수로 미끄러져서 떨어져 죽은 줄 알았는데, 계속 떨어져 죽으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김생원은 이미 상당히 자란 새끼 제비들이 실수로 떨어져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은 제비들의 부리를 벌려 보았다.


부리를 벌려보니 놀랍게도 입 속에 가시가 들어 있었다. 결국 새끼 제비들은 계모로 들어온 어미 제비가 물어다 준 가시에 목구멍이 찔려서죽은 것이었다.

 

전처 소생을 미워하는 것은 제비나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의 김씨 문중에는 오늘날까지 자식 있는 사람이 상처하면 새로 장가를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잃어버린 고양으로 세운 석탑


안동군 서후면 자품리 천지부락 뒤에 우뚝 솟은 학가산은 882m를 자랑하는 안동 제일의 雄蜂(웅봉)으로서 안동, 예천, 영주 3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산에는 멀리 신라시대의 능인도사가 10여년간 수도한 능인굴이 있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는 맑은 석간수가 요즘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능인굴에서 200여리 떨어진 영주 봉황산의 부석사는 삼천 승려들이 수도를 하던 큰 사찰이었다. 삼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식사 공양(절에서는 식사를 공양이라 함)은 보살들의 큰 일과였다. 아침저녁 밥이며 나물이며 수저들을 챙겨 한 명의 스님도 빠짐없이 공양을 올려야 되는 보살들은 늘 신경을 쓰며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공양때 였다. 스님 한 분이 밥 한 그릇이 모자란다며 밥을 청했다. 그러나 공양을 올린 보살은 분명 맞게 올렸으므로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헌데 그 날 아침에 없어진 밥 한 그릇이 저녁때 또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없어지기 시작한 밥 한 그릇은 이튿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없어 졌다. 스님의 공양들이 차례로 한 그릇씩 계속 없어지자 스님들은 서로 시비가 붙게 되었고 드디어는 싸움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스님들은 부석사에서 가장 지고하신 고승을 찾아가 그 연유를 밝히고 대책을 물었다. 고승은 "허허,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공양이 한 그릇씩 없어진다는 것은 누군가 먹기 때문이 아닌가? 허나 공양 도둑은 부석사 안에는 없네. 조석으로 부석사 공양을 한 그릇씩 먹는 자는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학가산의 능인도사라네."


이 말을 들은 삼천 스님들은 공양 한 그릇씩 없어진 것에 대해 분풀이 할 것을 결의하여 돌을 하나씩 들고 능인도사를 찾아갔다.


학가산의 북쪽 산등성이 까지 오자 능인도사는 신통술을 부려 삼 천 승려들 앞에 떡 나타나더니 벙글벙글 웃어대며"도둑은 한 가지 죄, 잃은 놈은 열 가지 죄라 했는데 오히려 잃은 놈들이 나를 벌하러 왔느냐."

하며 빈정대자, 스님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저마다 흥분하여 돌을 내려치려 하니 능인도사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준엄한 목소리로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추구하는 사문들로서 이것이 왠 추태인가, 오히려 자기의 공양을 남에게 주어야 하거늘 자기의 공양을 빼앗겼다고 속세의 무리들처럼 살생을 하려는가?"


엄한 꾸중에 부석사 3천 승려들은 크게 깨달아 능인도사를 죽이려고 들고 온 돌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탑을 쌓았다.


이 탑은 학가산 북쪽 계곡을 가로막고 서 있으며 한 쪽 변이 16m, 높이가 15m나 되는 거대한 자연석탑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열녀 이천서씨 이야기

현재 안동시 율세동에 이천 서씨 열녀비가 있다.

이 열녀비에는 다음과 같은 애달픈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안동 고을의 향리인 김창경(金昌慶)은 집이 몹시 가난한 가운데 이천 서시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집안 사정도 넉넉하지 못하고 시부모는 소경과 앉은뱅이인 불구였지만 서씨는 아무 불평 없이 남편과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착한 며느리 때문에 불구와 가난으로 찌들었던 어른들의 얼굴에 웃음 빛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서씨가 시집 온지 일년만에 남편 김씨가 시름시름 병으로 앓다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서씨에게는 남편의 죽음이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청상과부가 된 서씨는 앞일을 생각하니 눈물과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불구인 시부모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기운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서씨는 소경과 앉은뱅이인 시부모의 눈과 발이 되어 주어야하는 것은 물론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까지 담당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동네의 방아품과 빨래품을 팔아 양식을 구해 오기도 하고, 산에 가서 땔감나무를 해다가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시부모는 불구인 까닭에 아무 일도 하지 못했지만 워낙 부지런한 서씨 며느리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뿐인 아들을 갑자기 잃고 난 뒤로부터는 화병이 들었는지 시부모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며느리 서씨는 시부모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에 좋다고 하는 약초를 캐어 달여 올리기도 하고, 품을 판 돈으로 약을 지어 드리기를 정성껏 하였다.


마음에 얻은 병이라서 그런지 아무 약을 써도 효과가 없고 병은 점차 악화되기만 했다. 그럴수록 며느리의 정성은 더 지극하여 갔다. 이미 서씨는 시부모가 죽으면 같이 죽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병간호를 하고 있었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서시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떴다. 서씨는 즉시 목숨을 끊어서 불효를 사죄하려고 하였으나 자기가 죽으면 시부모의 장례를 치러 줄 사람이 없을 것으로 여겨서 눈물 속에 시부모의 장례식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자기가 남아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서씨는 먼저 간 남편과 시어른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죽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서씨는 9일간의 단식 끝에 목숨을 끊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씨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녀를 고이 장사지내고 그 이야기를 관청에 알려 열녀비를 세우게 했다.


우리나라에는 열녀와 효부가 많지만 서씨처럼 시부모를 따라 목숨을 끊은 이는 흔하지 않으며, 그 효성은 길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다.

 

 

 

갈라산 갈라당

옛날에는 안동과 의성을 잇는 길은 이 갈라산이 길이 가장 가까웠다

 

그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는데,

어느날 의성에서 안동으로 시집오는 색시를 태운 가마와,

안동에서 의성으로 시집가는 색시를 태운 가마가 갈라산 중턱에서 마주치게 된게라.

 

한쪽은 험한 산이고

다른쪽은 높은 낭떠러지인 좁은 길이기 때문에

서로 비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단 말이래.

 

옛날에는 초행길 가마가 물러서면 재수가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맛꾼들이 서로 물러서지 않고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비켜갈 수가 없어서 양측의 가마꾼들이 힘으로 맞부딪치게 된게라.

 

인제 가마를 맨 채 가마꾼들은 밀고 당기는 가마싸움이 벌어졌는데.

힘이 약한 쪽의 가마가 차츰 밀리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그래 고마 가마 속에 타고 있던 색시도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

그래가 갈라산 중턱에 이날 죽은 각시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각시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된게라.

 

 

 

여우동생을 물리친 겸암선생

서애 대감은 이름이 이룰 성(成), 용 룡(龍)자고, 그 형은 구름 운(雲), 용 용(雲龍)자 거든요.

근데 운용선생은 그 분은 숨은 선비고, 서애대감은 영의정도 하고 병조판서도 했으이께네, 출장입상(出將入相)한 사람이라. 서애대감하고 겸암선생하고는 한 형재간이고 우애도 깊었어요.

 

근데, 서애대감 어른이(아버지) 나이 칠십에 소가(小家-재혼)할라고 청해서 그래 소가를 했는데, 꽃 같은 젊은 부인을 데루 왔다는 게래. 그래 혼인을 하고 얼마 안있어 꽃 같은 동생을 하나 낳았어. 이레 보이 동생도 참 잘 났어요.

 

그래 아가 점점 장성하니 겸암선생하고 서애대감하고 수의를 했어요. 암만 시동생이지만 그래도 맹(역시) 아부지 혈육인데 우리가 그 동생을 장가 보내야 되니 선을 보러 가자.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가집으로 갔어요.

가니, 그 집에서는 서애대감 명성을 듣고 자꾸 딸을 줄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겸암 선생은. 동생, 거 안되네. 사람은 배필이래야 되지, 배필이 아니면 안되네. 하면서 반대를 하는게라. 그런데 서애 대감은 가문도 좋고, 여러 가지 다 좋은데 혼인을 성사시키지요 하면서 자꾸하자 졸라도 겸암선생은 안되네 안되네. 한단 말이래. 그이 서애대감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형이라도 괘씸하단 말이래.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형보다 못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사무(계속) 불평을 하면서 서애대감은 뒤에 오고 겸암선생은 앞서 가는데, 마침 어떤 촌에 오다가 소나기를 만나서 오두막집에 들어가게 되었어. 오두막에 들어가 보니 웬 노인하고 처자하고 앉아서, 노인은 신을 삼고 처자는 심부름을 하고 있거든.

 

그래서 겸암선생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더니마는 그 심부름하는 처자를 동생 배필로 삼자는 거라. 그래 고마 그집에서도 좋다고 하거든. 이 모습을 보니 서애대감이 성이 많이 났어. 신이나 삼고 있는 하잘 것 없는 노인하고 사돈을 맺을려고 하니 성이 안나겠어. 그래도 형이니까 말도 못하고 시름시름 내려왔어.

 

그 일이 있고부터는 형제간에 우애가 끊어지게 되었어. 서애선생은 화가나서 겸암선생 방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서로 소원하게 지냈다 말이래, 그랬다가 하루는 겸암선생이 서애 대감을 불렀어,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데. 동생 동생, 여기 들어와보래. 그래 서애선생이 마지못해 들어갔단 말이래.

 

그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오늘이 시동생 혼사날인데 여기 있으면 제수씨하고 올라그랬으니 있어보자. 그래서 방이 있게 되었는데 새벽녘에 쯤 되니, 뜰 담 아래서 쿵! 하는 소리가 나거든. 그래서 문을 턱 열어 보니, 꼬리가 아홉자난 예끼(여우)가, 말하자면 구미호(九尾狐)가 자빠져 있는게라.

 

조금 있다보니 저번에 보았던 그 심부름하던 처자가 들어오더니만 하는 말이 이만하면 되지요? 그런단 말이래. 갑자기 예끼가 나타나고 처자가 나타나니 서애대감이 놀라서, 뭐로? 하고는 왜 근노(그러노)? 하고 묻는다 말이래. 그러니 겸안선생이 말하기를, 동생 동생,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소가 들룰 때(재혼할 때) 색시로 들어온 것이 그 예끼래, 아버지가 홀려서 그른게래. 그런데 아부지가 들인 색시가 예끼라고 말릴 수는 없잖는가?

 

그래 있다보니 예끼 새끼가 났는데, 맹 구미호란 말이래. 그러니 그걸 남의 손을 빌려가주고 죽여야 되지. 아부지 혈육을 우리 손으로 죽일 수는 없잖는가? 안 그런가? 부모혈육을 말이래. 나는 그전에 신을 삼는 사람이 보통 사람 아닌 줄 알았다 말이래. 그런데 만약에 재상 집 처자를 색시로 들였으면 예끼동생인데 전부 죽을 꺼라 말이래 그러거든. 그 소리를 들은 서애 대감이 항복을 했다는 게래.

 

 

산신령과 내기 바둑 두어 황금 얻은 퇴계선생

퇴계선생은 바둑도 국수급이래요. 바둑을 아주 잘 뜨는 분이라. 어느 날 금강산 유람을 들어갔는데, 한참을 가다가 보니 어느 젊은 사람이 마상(馬上)에 떡 앉아서 퇴계선생을 보고 말을 아주 반말 비슷하게 말을 걸드라 그해요.

 

저 당신 이황선생이지요. 아 그렇다.고 하니. 당신이 나이도 많고 유학자이지만 바둑도 잘 뚠다는데. 하고 반말 비슷하게 하이께네. 퇴계선생이 바둑 잘 뜨지는 못하고, 그냥 외유나 하고 논다.고 답을 했어.

그러니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럼 내하고 바둑 한 번 둡시다. 한단 말이래.

 

그래 퇴계선생이 마지못해서 그럼 뜨자고. 하니. 젊은 놈이 마상에서 내리더니만 바둑판을 펼치는게라. 퇴계선생이 가만이 보니, 바둑판과 바둑알이 전부 쇠고 금이래. 바둑판을 펼쳐서 바둑을 두려고 하니, 젊은 놈이 하는 말이 어 뭐라도 내기를 하자.

그러거든. 그래 퇴계선생이 어떤 내기를 하면 좋으냐.고 물으니 내가 지면 이 바둑판하고, 이 주먹만한 금덩어리 주께고, 만약에 퇴계선생이 지면 내 요구대로 해달라. 카는 게라. 그래 퇴계선생이 요구가 뭐냐? 고 물으니

 

당신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를 못하니, 당신이 이 세상에 없어져야 되겠다. 하는게라. 말하자면 죽일 챔이라. 그라고 젊은 놈이 계속 독촉을 하면서 자신이 있으면 뜨자. 그래 독촉을 하거든.

 

그래도 점잖은 사람이 안할려고 하니, 젊은 사람인데 물러서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바둑을 뜨게 되었어. 그런데 이 젊은 사람이 아주 바둑을 잘 둬서 마지막에 가니 고마 대마가 죽을 판이라,

 

한점만 잘못 두면 대마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두려워서 바둑알을 놓지도 못하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그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 단디 보시고 놓으시소. 내 저 소변보고 오지요. 하면서 일어서서 어디로 가는게라.

퇴계선생이 속이 타가 바둑판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더벅머리 총각이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손가락으로 바둑판 다음 놓은 자리를 짚어 주고는 누워버리는게라.

 

그래서 짚어준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희한한 곳이라. 그게 참 묘수이거든. 그래 가만히 있다가 젊은 사람이 소변을 보고 앉으니, 퇴계선생이 더벅머리 총각이 짚어준 그 자리에 딱 바둑알을 놨어.

 

그래 바둑을 두고 나니 젊은 사람이 성을 버럭내더니만 더벅머리 총각을 가르키면서 저놈 짓이제? 죽일 놈. 이러면서 바둑판하고 보따리하고 싸가지고 가 버렸어.

 

내기를 했으니 금덩어리는 내두고 가버리거든. 그 뒤에 더벅머리 총각이 일어나더디만 말 하는게라. 저 젊은 사람은 태백산 신령인데 젊은이로 가장 해서 퇴계선생을 잡으러 왔고,

 

나는 금강산 산신령인데 퇴계선생이 죽을까바 살릴라고 옆에 누워 있었다.그는 게라

 

 

 

벌거벗고 대문을 들어선 김부의 聾岩(농암) 선생의 사위 김부의


어느 봄날 분내(分川) 농암 선생 댁에 괴이한 청년이 알몸으로 대문에 들어서서 주인을 찾았다.

"어떻게 오셨소?" 농암 선생은 너무나 이상해서 찾아온 사연을 물었다.


"저는 외내에 사는 김부의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우연히 냇가에 나왔다가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잉어를 잡으려고 옷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계속 잉어를 쫓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가려니 배도 고프거니와 알몸으로 돌아가려니 부끄러워서 분내에서 가장 큰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농암선생은 속으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하인을 시켜서 사랑으로 들게 하였다. 아침을 후하게 대접하고 자기가 입던 명주옷을 한 벌 입혀서 보냈다. 그 무렵, 농암 선생에게는 출가시키지 못한 딸이 있었다. 맏딸인 그녀는 성질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서 마땅한 신랑감을 찾지 못했다.


농암 선생은 이 청년이야말로 맏딸의 사윗감으로 적당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암 선생은 매파를 보냈는데 양쪽의 뜻이 맞아 성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혼 후에도 그녀의 난폭한 성질은 고쳐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납고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 김부의는 회초리로 때려서 그 못된 버릇을 고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농암 선생은 무릎을 치면서 "김부의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그 청년이 아니면 누구도 내 딸의 난폭한 성질을 고치지 못해. 이제는 됐어. 김부의 내외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하고 기뻐했다.


그 후 김부의는 부인의 내조를 얻어서 경상좌통 병마절도사(慶尙左通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경상좌통 병마절도사 시절에 김부의는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고향인 외내에 왔다. 자기집 뒷산으로 올라간 그는 목표도 없이 활을 세 발 쏘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화살이 꽂히는 곳이 우리 내외의 幽宅이다" 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보름만에 세 개의 화살 중에 하나를 찾았다. 그 자리가 바로 와룡면 나소동 연산못 앞산에 있는 김부의 내외의 묘소이다. 묘소는 좌우로 나란히 있고 묘지 양쪽에는 장군석이 우뚝 서 있다.


장군석을 세울 때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장군석을 세우던 날 밤에는 괴이한 일이 생겼다. 묘지에서 약 200m쯤 떨어져 있던 자연석으로 된 돌부처가 거꾸로 넘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데 그 모양이 돌부처와 흡사해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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