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들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적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땅이 넓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모여 고을을 이루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고장에서는 안동 시내를 비롯하여 풍산, 일직, 임하, 예안 등에 이미 삼국시대부터 크기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고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가 우리 고장 병산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울 때 이 고장 출신 삼태사가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물리쳤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추측해보건대 삼태사는 전투에 공을 세울 만큼 상당한 수의 병력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태조는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삼태사에게 식읍(食邑)으로 하사한다.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의 포섭 과정에서 식읍 제도를 실시한 것은 호족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후 안동은 삼태사의 후손들이 재지사족이 되어 고을을 다스렸다. 후일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기까지 자체적으로 주민들에게 조세를 거두어 일부는 중앙으로 보내고 나머지로 고을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는 중앙에서 관리들이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어느 고을이고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제6대 성종 2년(983)부터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했으나 파견되지 않는 고을이 더 많았고 설사 파견되더라도 지방 행정의 실무는 그 지역에서 우월한 경제 기반을 가진 유력 가문의 토착세력이 향리가 되어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 개성의 중앙 정부 관료는 태조가 고려를 세우는데 공헌한 개성 중심의 귀족들과 고려의 건국에 적극 참여한 지방 호족과 신라에서 간 지식인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음서(蔭敍) 제도를 통해 권력을 세습하였다. 그러므로 지방 호족들의 중앙 정계 진출은 거의 불가능했고 그들은 계속 지방에 머무르면서 토성들에 의한 집성촌이 생겨났다.
안동에 본을 둔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 일직손씨, 예안김씨, 풍산김씨, 풍산류씨, 풍산홍씨, 풍산심씨 들이 그들의 관향인 고을의 대표적 호족으로서 그 고을을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토성 중심 사회의 변화
토성(土姓) 중신의 지역 사회 구조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사회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되었다. 즉 고려사회가 안정되자 대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은 스스로 부패되기 시작하고 특히 권력을 장악한 문신 계급은 모든 권력을 자기들이 독식하며 무신 계급은 경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무신 경시 풍조가 극에 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젊은 무신 세력들이 고려 18대 의종 때(1170년)에 난을 일으켰다. 이때 난의 주동자들은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쳐 선동하며 거의 모든 요직의 문신들을 죽이고 왕마저 폐위하고 권력을 자기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무신의 난이 진정되면서 무신들은 너무 많은 문신을 죽인 탓에 관리가 부족하여 그들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리하여 지방의 향리들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교양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정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였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은 비록 무신정권 아래에서였으나 정치 실무를 담당하며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에는 중앙 정계를 지배했다. 특히 그들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자기들의 연고지인 지방에도 경제적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들 관료 사이에 혼인 관계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들이 중앙 정계에 활동하다가 낙향할 때는 고향으로 가기도 하지만 외가나 처가가 있는 곳으로 낙향하는 예가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는 재산 상속에 아들딸의 구별이 없이 균분 상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지금까지 토성으로만 내려오던 지방에도 다른 성씨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안동에 사는 성씨들
1. 안동부 토성
영가지에 안동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는 김(金)․권(權)․강(姜)․조(曺)․장(張)․고(高)․이(李)․우(禹)․곽(郭)․조(趙) 등 10성이 나오나 실제로 현재 김(金)․권(權)․장(張)만이 세거하고 있다.
안동권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성을 하사받은 태사 권행(權幸)의 후예로 대대로 안동에 거주해왔다. 고려 고종 조에 처음 권수평(權守平), 수홍(守洪) 형제가 상경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고 특히 형 수평의 증손 권부는 안향의 문인으로 다섯 아들과 네 사위가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사위 이제현은 당대 제일의 학자로 이름 높았다.
권수평의 후손은 조선 시대에도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으며 안동으로 낙향하지 않고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 이어 살았으니 안동권씨로 기호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후손이다. 권수홍의 후손은 고려 말 안동으로 다시 낙향했다. 권인(權靷)은 예의판서로 고려가 망하자 서후 교동으로 낙향했다. 권인의 손자 계경(啓經)은 횡성현감으로 있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때 사육신으로 멸문을 당한 하위지의 조카 하원(河源)이 봉화로 내려와 외조부인 금혜(琴嵆)의 집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갔던 계경(啓經)의 아들 개(玠)는 데리고 와서 사위로 삼아 이웃에 살게 했다. 서후 교리에 사는 진주하씨는 하원의 후손으로 훗날 하위지가 신원되자 그의 후사를 이어 제향하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권개의 후손은 교동에 이어 살았는데 증손자로 선조 조의 학자인 송암 권호문(權好文)의 <관물당 종택>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그 후손은 서후 부근, 풍산 노동 등지에 살고, <영가지>를 편찬한 용만 권기(權紀)의 후손은 길안 송사에 살고 있다.
권개의 동생 권곤(權琨)의 증손자로 서후에 살던 덕기(德祺), 덕봉(德鳳) 형제는 둘 다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씩 있어 사위를 맞아 후사를 이으니 형 덕기의 사위는 장팽수(張彭壽)이고 동생 덕봉의 사위는 김성일(金誠一)이니 이리하여 의성김씨와 안동장씨가 서후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권곤의 아들 사빈(士彬)은 외조부인 청주정씨 좌랑 정약(鄭若)의 외손자로 그의 별서(別墅)가 있는 북후 도촌으로 이거하니 이곳에 거주하는 안동권씨는 사빈의 후손이다. 사빈의 둘째 아들인 충재 권벌(權橃)은 명종 조에 우찬성을 역임한 명신으로 외가가 있는 봉화 유곡(닭실)으로 이거해서 그 후손은 봉화에 살고 있다.
권수홍의 후손으로 영주군수를 역임한 권항(權恒)은 풍천 가일에 방대한 영토를 가진 풍산류씨 류서(柳湑)의 사위가 되어 안동 부내에서 가일로 이거했다. 권항의 손자 권주(權柱)는 경상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했으나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그 약사발을 가지고 갔다 하여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후일 중종반정으로 억울함이 풀렸으나 이번에는 중종 조에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던 권주의 둘째 아들 권진(權磌)이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일파로 또 즉음을 당하고 맏아들로 안동 예안으로 유배된 권질(權礩)의 따님이 퇴계 선생의 둘째 부인이다. 현재 가일에는 권주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영조 조에 방숙 권구(權榘)가 학자로 이름 높았다.
김선평의 후예인 안동김씨는 안동의 대표적인 호족으로 삼태사의 후손이 모두 고려를 식읍으로 다스렸으므로 고려 초기에는 안동 부내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안동김씨는 고려 말에 풍산현 남불정촌(영가지에 불정촌은 풍산현 하리는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음)에 거주했다. 김득우(金得雨)는 퓽산류씨 류개(柳開: 하회입향조 류종혜의 숙부이고 안동권씨 가일 입향조인 권항의 처증조부)의 사위가 되었고, 아들 김혁(金革)은 풍천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권희정(權希正: 세종 조 좌의정을 역임한 권진의 부)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권희정은 7남 3녀가 다 이름 있었는데 세 사위는 흥해배씨 안동입향조인 배상지(裵尙志),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의 차남 이운후(李云候), 세째가 김혁이다. 이러한 조와 부의 강력한 기반 아래 세종 조에 비안 현감을 역임한 김삼근(金三近)이 현재 안동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소산리 입향한다. 김삼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장자 계권(係權)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다 뛰어났다. 첫째는 성종조의 고승 학조대사이고 아래 네 아들이 모두 벼슬을 하였다. 특히 막내 사헌부장령 영수(永銖)의 후손은 서울로 이거하여 후손 김상용(金相容), 김상헌(金相憲)은 형제가 인조 때에 정승을 역임했다. 김상헌의 후손이 안동김씨 장동파로 연이어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세 왕비를 배출하며 조선 말기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또 소산에 살던 북애 김후(金垕)는 아주신씨 외가를 따라 풍산 현애리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이어 살고 있으니 그 후손으로 독립투사인 김시현(金時顯)이 있다.
차남은 성종 조의 대사헌을 역임한 명신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으로 후일 세조 조에 사헌부장령을 역임함 장인 의령남씨 남상치(南相治)를 따라 길안 묵계로 이거하고 그 후손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안동장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태사 벼슬을 받은 삼태사의 한 분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다. 안동장씨도 고려 조에 상경하여 개성에서 대를 이어 벼슬을 하였다. 조선 초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운 장사길(張思吉)의 5대손 장의(張儀)가 안동으로 내려오는데 그의 5대손인 장팽수(張彭壽)는 서후에 사는 권덕기(權德祺)의 사위가 되어 금계에 자리를 잡았고 그 아들 장흥효 (張興孝)는 김성일의 제자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대학자이고 경당의 따님인 정부인 장씨는 학행이 사임당에 비견되었으며 장부인의 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과 손자 밀암 이재(李栽)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 이름 높다.
경순왕의 후예인 안동김씨(상락김씨, 선안동김씨)는 풍산 회곡동에 거주했다. 고려 후기 전국적으로 재지사족들의 상경종사가 시작될 때 안동에서 가장 먼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가문이 안동김씨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으로 대표되는 가문이다. 김방경은 출장입상으로 안동김씨를 고려의 대표적 가문으로 성장시켜 그 후손이 대를 이어 벼슬을 하며 다른 지역 출신의 가문과 혼인 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청주정씨, 의성김씨, 광산김씨, 평산신씨 등 다른 지역 성씨들이 안동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상락김씨는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내려오기도 했지만 전국적으로 흩어졌으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도 그 후손이다. 안동에 살고 있는 상락김씨는 대부분이 조선 태종 때에 좌정승을 역임한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풍산 소산에 입향한 김언준(金彦濬)도 그 후손이다.
고성이씨,조선 세종 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고성인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로 영산현감을 역임한 이증(李增)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산수가 아름다운 안동으로 내려와 부내 남문 밖에 살다가 후에 법흥동으로 이거했다. 이증에게도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아들 이굉(李浤), 이명(李洺)과 손자 이윤(李胤), 이주(李冑), 이려(李膂) 등 한 집안에 5명이 연산조 때 사화에 연루되어 이주는 죽고 나머지는 귀양 갔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개성유수를 역임한 이굉은 낙동강변에 귀래정을 짓고, 형조좌랑 이명은 법흥동 낙동강변에 임청각을 짓고 자연을 벗삼았다. 현재 안동에 사는 고성이씨는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는 고성이씨 이응태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고, 임척각은 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경주김씨는 고려중엽에 김인관(金仁琯)이 벼슬을 하다가 은퇴하고 안동 상촌(현 금곡동)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그 후손 상촌 김자수(金自粹)는 일직손씨 손홍량(孫洪亮)의 외손자로 고려 말 과거에 장원급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켜 안동에 내려와 부내 상촌에 살면서 마을이름으로 자호했다. 현재 경주김씨는 안동에는 집성촌이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안동 부내에 세도를 부릴 정도의 대성이었다고 하며 현재 상촌의 후손들은 경주김씨의 대표할 정도로 많으며 다른 지방에 더 많이 사는데 서예가 추사 김정희도 그 후손이다.
안동 운안동은 함안조씨 오백 년 세거지이다. 입향조 조욱(趙昱)은 생육신인 조려(趙旅)의 종제로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단종이 죽자 삼년복을 입었다. 후일 조욱은 벼슬에 나가 안동교수를 역임했으며 성종이 즉위하고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은퇴, 전에 안동교수로 있을 때 인연을 튼 운안동에 터전을 열어 정착했다.
안동에서 달성서씨는 시내 수상동과 수하동에, 대구서씨는 일직 망호리에 살고 있는데 원래 한 본이라고 한다. 달성서씨는 대구에 대대로 살았는데 조선 중기 통정대부를 지낸 서수영(徐壽永)이 수상동에 들어온 입향조이다.
2. 풍산, 풍천의 집성촌
들이 넓은 풍산은 삼국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풍산읍 중심지 안교동에 현재있는 우물은 사성정(四姓井)이라고 부르는데 김씨, 류씨, 홍씨, 심씨 이 4성이 한마을에서 같이 살면서 함께 마셨다고 한다. 이들이 지금의 풍산김씨, 풍산류씨, 풍산홍씨, 풍산심씨이다.
풍산김씨의 시조 김문적(金文迪)은 고려 고종 때에 출사하여 풍산백의 봉작을 받는다. 그리고 4세 김연성(金鍊成)도 풍산백을 받는다. 고려의 봉작제도는 후손이 관직에 나가는 특전이 부여되고 또 일반적으로 그의 향리에 식읍을 받는데 풍산백을 받은 것으로 보아 풍산에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태조 조에 김자량(金自良)이 병조판서로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주살되자 동생 김자순(金自純)이 선조의 별업(別業)이 있는 오미동으로 내려온다. 그후 후손들이 오미동에 세거하며 후손 중에 전라감사를 역임한 김양진(金楊震)은 청백리에 오르고 조선 인조 조에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아들 중 5형제가 대과에 올라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도 하사받고 그 후손들이 오미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각 지방에 살고 있다.
풍산류씨는 시조 류절(柳節)이 보첩에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 풍산의 호장을 역임한 것을 알 수 있다.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 김, 장 세 성씨가 안동의 향리직을 세습하며 안동을 다스리듯, 아마 풍산을 본으로 하는 위의 4성이 고려조에 풍산을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공조전서를 역임한 류종혜(柳從惠)는 풍산 상리에 살다가 하회 마을로 이거하여 풍산류씨 하회 입향조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하회 마을에 허씨와 안씨가 먼저 정착해 살았다고 하며 류종혜가 입향할 때도 같은 전서 벼슬을 한 배상공(裵相恭)과 같이 이거했다고 하나 지금의 하회는 풍산류씨의 집성촌이다. 특히 조선 선조 조의 명상 류성룡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상으로 이름 높다. 하회에는 류운룡(柳雲龍) 류성룡 외에도 조선조에 벼슬한 이들의 많은 고택이 즐비하여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반촌 마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은 서애 류성룡의 종숙으로 역시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나 33세로 요절했는데 그 후손들은 하회와 이웃한 풍천면 광덕리에 살고 있다.
풍산심씨의 시조 심만승(沈滿升)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고려 예종 때 상선을 따라 동해안에 도착하여 태백산 아래 풍산현에 정착하였다고 풍산심씨 보첩에 나온다. 이 심씨는 조선 태종 때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풍산군에 봉해진 풍산군에 봉해진 심귀령(沈龜齡)과 종종 조에 좌의정 심정(沈貞)이 있으나 현재 안동에는 그 후손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다.
풍산홍씨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고려 고종 조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그의 아들, 손자 3대가 벼슬을 이으며 풍천에 이거하여 살아 3대의 묘소도 풍천 신성리에 있다. 풍산홍씨는 고향에는 몇 집 없으나 타지로 나가 크게 현달하였으며 조선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정조 조의 세도가 홍국영(洪國榮) 등이 유명하다.
안동권씨 권집경(權執經)은 고려 충선왕 때 예천부원군에 봉해진 권한공(權漢功)의 증손자로 상주목사를 역임했다. 권집경은 구담을 지나다가 강산의 경치가 아름다운 구담에 정착했는데 그에게는 딸만 하나 있어 사위인 순천김씨 예조참의 김유온(金有溫)이 처향을 따라 정착하여 살게되었다. 그 후손들은 계속하여 구담에 살며 구담을 떠난 인물로는 선조 조에 장원급제한 김여물(金汝岉)은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서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에서 신립(申砬)과 함께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또 인조반정에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어 영의정에 오른 김류(金瀏)도 김유온의 후손이다. 구담에 살고 있는 순천김씨 김윤명(金允明), 김윤안(金允安) 형제는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의 영남의병군에서 활약했으며 김윤명은 안음현감, 김윤안은 대구부사를 역임했다.
풍산 상리에는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섞여 살고 있다. 전의이씨로 고려 조에 벼슬하던 전농정 이웅(李雄)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풍산 소산리 설못에 내려와 살았다. 그 아들 이화(李樺)는 조선 초 왜구와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 후손은 현재 안동시 풍산읍 하리에 예안이씨와 같이 살고 있는데 영조 조에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산두(李山斗)의 영정을 모신 영조의 어필영정각(御筆影幀閣)이 하리에 있다.
풍산읍 만운리는 연안송씨 500년 세거지이다. 셰조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용궁현감을 역임한 송수은(宋守殷)이 용궁에서 풍산현으로 이거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그 아들 희문(希文)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현재 풍산을 중심으로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다.
풍천면 인금리에는 평해황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평해황씨 황천계(黃天繼)는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후일 조선 건국에 공이 커서 경상관찰사를 역임한 후 만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안동 예안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풍천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또 후손 황흥세(黃興世)의 부인 삼척김씨가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시 풍산으로 이거하여 서미리 목현에 황씨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잇다.
3. 서후, 북후의 집성촌
고려조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손홍량의 외손자이고 또 안동권씨 권희정(權希正)의 사위인 흥해배씨 백죽당 배상지는 고려가 망하자 외가와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서후에 자리잡는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차자 배환(裵桓)은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다섯이 모두 무과에 급제한 영양남씨 남민생 가문과 배상지 가문을 합하여 ‘배문남무(裵文南武)’라고 하며 부러워했다.
배상지의 장자 배권(裵權)의 후손으로 봉화에 이거해 살던 배천석(裵天錫)은 조선 명종 조에 다시 선향인 금계로 돌아왔다가 예안면 도목촌으로 이거했는데 그 아들 배삼익(裵三益)은 퇴계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고 그 아들 배용길(裵龍吉)은 임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벼슬에 나아가 충청도사를 역임했다.
경주이씨 이승직(李繩直)은 세종 조에 대사헌을 역임하고 처향을 따라 금계로 내려왔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안악군수로 있던 장자 명민(命敏)은 계유정난 때 김종서의 일파로 몰려 세 아들과 함께 죽고 차남 시민(時敏)은 예안현으로 귀양갔다. 시민의 아들 용재 이종준(李宗準)은 성종 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성현령을 역임했으며 연산조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대를 이어 화를 입은 관계로 경주이씨는 다른 곳으로 이거하고 안동 지방에는 별로 살지 않는다.
원주변씨는 원래 중국인으로 고려 공민왕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변안렬(邊安烈)을 시조로 한다. 변안렬은 원주원씨와 결혼하여 원주에 정착함으로써 원주를 관향으로 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이성계를 제거하고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는다. 그 현손 희부(希父)는 연산조 때 무오사화를 피해 영주에 낙향해 있었는데 그의 아들 광(廣)이 서후에 살던 권철경(權哲經)의 사위가 되어 금계에 입향한다. 그의 아들 변영청(邊永淸)은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부사 재직 시에 선정으로 포상을 받았고 영청의 손자 변중일(邊中一)은 효자로 이름났으며 원주변씨는 서후를 중심으로 안동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의 대성이다. 조선 중엽 김계원(金繼元)은 단종의 사부 별동 윤상(尹祥)의 손자 윤수생(尹遂生)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로 이거하고, 계원의 동생 계정(繼亨)의 손자 침송(沈松) 김목윤(金牧潤)은 선조조에 김해부사를 역임하고 서후면 이송천으로 이거한다. 현재 목윤의 후손은 이송천과 안동시 노하동 등지에 살고 있다.
영월신씨는 원래 중국계 귀화인으로 시조는 고려 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문화시랑 평장사를 지낸 신경(辛鏡)이다. 후손 신내옥(辛乃沃)은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나 퇴계 이황의 명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동 서후 거진으로 이거해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며 류운룡(柳雲龍), 권호문(權好文) 등과 사귀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둘째는 문과, 셋째는 무과, 넷째는 진사 급제를 하였고 둘째 신의립(辛義立)은 5조의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후일 신씨는 낙양촌(안동시 수하동)으로 이거하였으나 홍수를 만나서 가문이 쇠하였다고 하며 거기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한양조씨는 조인벽(趙仁璧)이 조선 태조의 매부로 대대로 한양에 살며 벼슬한다. 그러나 중종 조에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변을 당하자 한양조씨들은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데 현감을 역임한 조종(趙琮)은 영주로 이거하여 그 후손이 경북 북부 지방에 흩어져 사는데 조종의 4자 신완(信琬)의 증손 적(積)부터 그 묘지가 저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조적의 대부터 서후 저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북후에 사는 진주강씨는 고려조 우왕 때 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한 공목공 강시(姜蓍)의 후손이다. 조선이 개국되면서 공양왕의 부마인 3남 회계(淮季)는 사형되었고, 공목공 또한 왕실의 척족이라 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성균좨주를 역임한 공목공의 장자 회백(淮伯)은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그 일파로 몰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렸다. 아들 종덕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당시 안동부에 속하는 감천현으로 내려왔는데 그의 증손 두전(斗全)이 풍기에서 연산조 무렵에 안동 북후로 이거하니 옹천을 중심으로 안동에 거주하는 강씨는 모두 두전의 후손인 셈이다. 후손 중에 강봉문(姜鳳文)은 효자로 알려졌고 강주호(姜周祜), 강주우(姜周祐) 형제가 학행이 높았다.
4. 일직, 남선, 남후의 집성촌
일직은 신라 때부터 안동부의 속현으로 있어왔고 현의 중심지인 송리가 현의 중심지이다. 일직손씨는 현 중심지에 세거하였는데 고려조에 손홍량(孫洪亮)이 출사하여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고 연로하여 사직하고 내려와 있다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에 몽진오자 76세의 노령에도 다시 나아가 지성껏 보좌하여 공민왕이 그 보답으로 지팡이와 손수그린 초상화를 하사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일직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대구서씨 서해(徐嶰)는 서울에 살았는데 장인인 고성이씨로 청풍군수를 역임한 이고(李股: 임청각 이명의 아들)가 무후하여 서울에서 일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서해는 23세로 요절하고 맹인인 이씨부인은 교육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경하는데 그 아들이 선조, 광해군, 인조 조에 명신으로 이름 높은 약봉 서성(徐渻)이다. 달성서씨의 현달한 사람은 대부분이 약봉의 후손이라 할 만큼 번성했으며 지금 망호리에 있는 서씨들은 후에 다시 내려온 약봉의 후손이다.
안동에 거주하는 한산이씨는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이문영(李文英)이 서애 류성룡의 사위가 되어 안동으로 들어온다. 문영의 아들 이홍조(李弘祚)는 용인현감으로 있다가 난세를 피하여 일직 향로봉 아래 이거하니 현재 안동 부군에 사는 한산이씨들은 모두 이홍조의 후손이며 후손 중에 대산 이상정(李象靖), 소산 이광정(李光靖)이 퇴계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이름 높다.
남선면 신흥리에는 파평윤씨들이 살고 있다. 파평윤씨의 중흥조인 고려조 윤관 장군의 후손으로 세종조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윤곤(尹坤)의 현손 윤황(尹堭)의 후손들이다. 입향조 무윤(茂胤)은 인조 조의 선비로 힌흥동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내었는데 그 후손들이 계속 이 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왔다.
진천송씨는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역임하고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진 송인(宋仁)의 후손이다. 조선 초에 예조참의를 지낸 송정공 송우(宋愚)의 6대손인 송복향(宋福麘)이 광해군의 난정을 피해 경기도에서 안동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그 후손이 현재 안동시 송천동, 및 와룡, 남선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후손인 해창 송기식(宋基植)은 한말의 학자로 안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서 감옥살이를 하였고 출옥 후 향리 남선면 학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麟谷書堂
5. 임하, 임동, 길안의 집성촌
의성김씨의 안동 입향은 안동김씨(선김)와 관련이 있으니 입향조 김거두(金居斗)의 어머니는 상락군 김흔(金忻)의 손녀이다. 이리하여 고려가 망하자 김거두는 외갓곳인 안동으로 내려와 풍산과 부내에 거주했는데 현손인 김만근(金萬謹)이 임하의 부호인 오계동(吳系童)의 사위가 되어 임하 천전으로 이거하여 손자 청계 김진(金璡)이 재산을 증식하고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다섯 아들이 현달하여 기반을 굳힌다. 그 후손은 각 지방에 뿌리를 내리는데 ‘청계 종택’은 내압에 있고, 학봉 김성일은 서후에 사는 권덕봉(權德鳳)의 사위가 되어 금계로 이거하고, 장자 극일(克一)의 손자로 숙종 조에 대사간을 역임한 김방걸(金邦杰)은 임동 지례에 거주하였으니 지금 지례 예술촌이 바로 ‘지촌종택’이다. 또 김진의 셋째 아들인 운암 김명일(金明一) 임하면 신덕리에 이거하였다.
의성김씨 김한계(金漢啓)의 셋째 아들 만흠(萬欽)의 증손인 김안세(金安世)는 경주이씨 이중립(李中立)의 사위가 되어 처가가 있는 일직 귀미로 이거하였는데 후손에는 정조 조에 예조참판을 지낸 김굉(金㙆)과 한말의 대학자인 척암 김도화(金道和)가 있다.
전주류씨 류성(柳城)은 영주 오천에 살았는데 청계 김진의 사위로 처향에 이거하여 천전에 이웃한 임동 무실에 자리잡았다. 전주류씨는 안동에 온 후 그 후손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이름을 떨쳤는데 임하댐 건설로 후손은 구미 해평으로 이거하고 현재 ‘기봉구려(岐峰舊廬)’라고 쓰인 돌비가 솟을대문을 앞에 있는 종택만이 수곡리에 있다. 후손으로는 퇴계 학통을 이은 대학자 정재 류치명(柳致明)이 유명하고, 또 예안으로 이거한 류정원(柳正源)의 ‘삼산종택’은 예안면 주진리에 있다.
동래정씨는 고려 말 안동 지방에 내려와 주로 예천 우망리에 살며 후손에 중종 조의 영의정 정광필 등을 배출하였다. 동래정씨 석문(石門) 정병방(鄭榮邦)은 예천 우망에서 태어났으나 전주류씨 류복기(柳復起)의 사위가 되어 송천으로 이거한다. 정영방은 정경세(鄭經世: 류성룡 문인으로 이조판서 역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선조 38년(160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실정을 거듭하자 스승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관직에 나갈 것을 여러 번 권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선생은 안동에서 영양 입압 연당에 이거하여 거처하다가 만년에 안동에 다시 와서 죽었는데 그 후손이 안동을 비롯하여 영양 입암 등지에 살고 있다.
예천임씨로 고려조의 이름난 시인인 임춘(林椿)이 정중부의 난을 피해 예천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후손이 예천에 살게 되엇는데 세종 조에 경상감사를 역임한 임자번(林自蕃)의 아들 문종(文宗)이 안동으로 이거하여 임하현 임당에 자리잡는다. 그러나 그의 현손 억숙(億叔)이 다시 임하 금소로 이거하여 금소리는 예천임씨 집성촌이 되었다. 금소를 세거지로 하여 안동 각지에 흩어져 사는 예천임씨들은 거의가 이 후손이다.
길안을 본으로 하는 성씨로는 길안임씨가 있다. 시조 임박(林樸)은 공민왕 때 성균좨주를 역임했으며 묘소도 길안에 있으나 후손들은 타지로 이거하고 길안에는 별로 살지 않는다.
6. 와룡의 집성촌
고려 말 제용소감(濟用少監)을 역임한 광산김씨 김무(金務)는 부인 안동김씨(선김)의 고향을 따라 낙향하여 남선 노림에 살다가 풍천 도양에 이거했다. 오천 군자리에는 고려말 효자요 부호인 황재(黃載)가 살았는데 김무의 아들 효지(孝之)가 그 사위로 들어갔다. 그런데 효지도 무후하여 종손자 김효로(金孝盧)가 도양에서 이거하여 마을을 이루어 번성하니 이 후손들을 광산김씨 예안파라고 부른다. 광산김씨 예안파 김효로의 아들 김연(金緣)은 중종 조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김부필(金富弼)의 호를 따서 종가를 ‘후조당 종택’이라고 부른다. 부필의 아들 김해(金垓)는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광산김씨 진사 김용석(金用石)은 안동권씨 가일 입향조인 권항(權恒)의 외손자로 또 구담에 사는 예조참의 김유온(金有溫)의 손녀딸을 아내로 맞으니 그는 외가와 처가가 모두 풍천에 있는 셈이다. 그는 연산 조에 스승 김종직이 화를 입자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처향을 따라 낙향했다. 김용석의 장자 황(篁)의 후손은 계속 풍천에 살았으나 4자 주(籌)는 와룡 가야에 사는 순흥인 안처경(安處貞)의 사위가 되어 처향으로 이거하는데 그의 아들이 퇴계의 제자로 많은 후진을 길러낸 유일재 김언기(金彦璣)이고 유일재의 장자 김득연(金得硏)은 문학에 뛰어나 많은 시와 시조가 전한다.
영양남씨는 고려 조에 안동에 들어온 성씨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전리판서를 역임한 남휘주(南輝珠)가 처음 와룡 서가현촌(현 서지)에 이거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들 민생도 무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민생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3대가 무반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남씨들은 남흥재사가 있는 세거지 와룡면 중가구리를 비롯한 안동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민생의 증손 팔개(八凱), 팔준(八俊) 형제는 일직면 망호동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또 팔개의 현손 융달(隆達)이 만년에 일직에서 풍산 신촌으로 이거하였는데 손자 천한(天漢), 천택(天澤) 형제가 숙종 조에 급제하여 형은 사헌부 대사간, 동생은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그리고 팔준의 후손 선조 조의 학자 남치리(南致利)는 퇴계의 고제로 이름 높았다.
단양우씨,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역(周易)을 처음으로 해석하여 후진들에게 가르쳐 역동선생(易東先生)으로 불리는 우탁(禹倬)은 충청도 단양인이다. 그는 고려 충선왕의 비행을 극간하다가 왕이 듣지 않자 성균좨주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다음 임금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양하고 처부인 영천이씨 목사 이원백(李元伯)이 사는 예안현에서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후에 사람들은 역동이 은거했던 마을을 도학(道學)과 충의(忠義)와 절조(節操)의 세 가지 덕을 갖춘 우탁이 만년을 보낸 땅이라는 의미로 지삼리(知三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동에 거주하는 단양우씨는 역동 선생의 후손으로 와룡을 비롯하여 임하, 길안 등지에 살고 있다.
청주정씨는 청주의 대표적 가문으로 충주목사를 역임한 정책(鄭㥽)은 김방경의 아들인 김순의 사위가 되어 그의 정오(鄭䫨), 정포(鄭誧) 두 아들이 외가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다시 상경하고 고려 공민왕 때에 정오의 아들 정침(鄭賝)이 안동이 안동에 내려와 선외가의 별업(別業)이 있는 와룡면 지내리에 터를 잡았다. 조선 선조 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정탁(鄭琢)은 청주정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만년에 예천 보문으로 이거했고 와룡면 태리에 청주정씨 ‘죽헌종택’이 있다. 그리고 안동에 거주하는 청주정씨는 거의가 정침의 후손이다.
순흥안씨는 영주 순흥에 거주하였는데 조선 초 안선손(安善孫)이 권구서(權九敘)의 사위가 되어 외룡면 가구리에 이거하여 손자 수(琇: 고성군수)와 증손 제(霽: 충청도사)가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함으로써 가문을 빛내었다. 현재 집성촌 가구리를 비롯한 안동에 거주하는 안씨들은 이들의 후손이다.
횡성조씨가 안동에 들어온 것은 예천 용문 금곡리에 살던 조원(趙瑗)이 함창김씨 김시경(金是敬)의 사위가 되어 예안현으로 이거하여서였다. 원의 아들 대춘(大椿)은 이웃 부라촌에 사는 권수익(權受益)의 사위가 되고, 손자 월천 조목(趙穆)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유일하게 스승과 같이 도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현 도산면 동부리에 월천이 살던 마을에 그가 학문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던 월천서당이 남아있다.
봉화금씨는 봉화의 대표적인 성씨로 금재(金梓)가 광산김씨 김효로(金孝盧)의 사위가 되어 에안현 오천리에 이거하여서이다. 금재의 아들 금응협(琴應夾), 금응훈(琴應壎)은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오천칠군자’의 칭송을 들었고 계속 진성이씨, 횡성조씨 등과 혼인하며 예안에 정착했다.
봉화금씨의 또 한 일파인 관찰사 금숙(琴淑)은 예안 부라촌에 사는 권간(權簡)의 사위가 되어 들어오는데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고 그의 현손인 성재 금난수(琴蘭秀)는 월천 조목의 매부로 같이 퇴계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그의 종택이 예안 부라촌에 있다.
능성구씨 구익명(具益命)은 청주정씨 좌랑 정약(鄭若)의 사위가 되어 충남 당진군 면천에서 안동으로 이거하여 와룡 가구리에 정착한다. 아들 인서(仁恕)이 서후에 사는 권자경(權自經)의 사위가 되어 다시 와룡 모사골로 옮겨살았고 그 증손 백담 구봉령(具鳳齡)은 퇴계의 제자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역임했고 와룡면 주계리에 종택이 있다.
반남박씨 안동 입향조는 세조조의 박숙이다. 그는 좌의정 박은(朴訔)의 증손 병균(秉鈞)이 홍주판관으로 재임했는데 갑자기 부부가 일시에 죽어 천애고아가 된 아들 박숙은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는 존고모부 이중(李重)을 따라 낙남하여 반남박씨 낙남시조가 된다.
그는 음보로 사직이 벼슬을 받았고 후일 능성구씨 구익명(具益命)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가구촌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영주를 비롯한 안동 일대에 살게 되었다. 박숙의 손자 박승임(朴承任)은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후일 대사간을 역임했으며 후손들이 영주로 이거하였다.
안동권씨 권징(權徵)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그 후손이 부내에서 와룡으로 의거하여 살았다. 후손 중에 권대기는 퇴계의 문인으로 와룡면 이상리에 이계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아들 다섯이 다 문명이 높았고 장자 송소 우(宇)는 왕자사부를 역임했고 동생 중 굉(宏)과 환(寏)은 임하로 이거했다. 그리하여 송소종택은 이상리에 있으나 권환의 이우당종택은 임하리에 있다.
충주지씨는 충주를 세거지로 하는 성씨로 시조 지경(池鏡)은 본래 송(宋) 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지낸 지정(池淨)은 당시 우의정 정분(鄭笨)의 생질로 계유정난 때에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교살되었다. 이리하여 그 후손이 화를 피해 와룡면 안동군 가구리에 이거하여 살며 선조를 기려 마을 안에 <우송정(友松亭)>을 세워 선조를 추모하며 지금까지 대를 이어 있다.
남양홍씨 홍응수(洪應守)는 봉화 소천에서 와룡 지내리로 이거해와 남양홍씨 지내문중 입향조가 된다. 현재 지내리는 남양홍씨 집성촌으로 안동에 이거하는 홍씨는 대부분 이 후손이다.
7. 예안, 녹전의 집성촌
진성이씨,예안의 집성촌진성이씨가 진보에서 안동으로 이거한 것은 송안군 이자수(李子脩)에 의해서이다. 이자수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송안군의 봉군을 받고 풍산현 마애촌에 자리를 잡았으나 잦은 홍수로 다시 와룡면 주촌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자수의 손자로 세종 조에 선산부사를 역임한 이정(李禎)의 아들 삼형제 대에 이르러 맏이인 우양(遇陽)은 주촌에 그대로 있고 둘째 흥양(興陽)은 다시 마애로 돌아오고 셋째 계양(繼陽)은 영양김씨 김유용의 사위가 되어 처향을 따라 예안 부라촌으로 이거하였으나 다시 도산면 온혜로 이거하니 그 손자가 퇴계 이황 선생이다. 그리고 이계양의 둘째 아들은 이우(李堣)로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이황의 형 이해(李瀣)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계양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일제에 나라가 빼앗기자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 독립운동가요 저항시인으로 이름난 이육사 등도 퇴계 선생의 후예이다. 예안의 진성이씨는 온계, 하계, 원촌 등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영천이씨는 고려말에 안동에 이거하였는데 입향조는 이헌(李軒)이다. 그는 서울에서 군기소윤 벼슬을 하였는데 만년에 예안현으로 내려와 사천에 터를 잡았다. 후에 맏아들 파(坡)가 분천으로 이거하여 분천이 영천이씨 세거지가 되었다. 이후 영천이씨는 농암 이현보(李賢輔)가 학문과 벼슬 모두 뛰어났고 그의 여덟 아들이 모두 훌륭하여 그 후손이 예안 분천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터를 잡았다. 이현보의 동생 현우(賢佑)의 아들 충량(忠樑)은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영주 오천으로 이거하였으며 그 아들 덕홍(德弘)은 퇴계의 고제로 학문이 높았고 영주 오계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예안이씨는 예안을 대표하는 성씨의 하나이다. 원래 전의이씨였으나 고려조에 이혼(李混)과 손자 익(翊)이 높은 벼슬에 올라 예안백으로 봉군되어 후손들이 예안이씨로 불리게 되었다. 이익의 손자 이송(李竦)은 고려조에 처남 염흥방의 난에 연좌되어 죽고 두 아들이 겨우 화를 면했는데 맏이인 이천(李蕆)은 세종조에 장영실과 더불어 천문기구, 활자, 무기, 전선, 책력 등 온갖 과학 기술의 발달에 크게 공헌한다. 현재 백곡의 후손이 예안면 일대에 살고 있다. 동생 이온(李韞)의 후손으로 증손자인 이영(李英)은 두 동생과 연산조의 폭정을 피해 처부인 진성인 이은(李垠)이 살고 있는 마애 부근의 상리에 자리를 잡았다.
예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또 예안김씨가 있다. 예안의 구호(舊號)를 따서 선성김씨로도 불리는 예안김씨는 고려조에 예안 호장(戶長)을 지낸 김상(金尙)을 시조로 하며 대2․3․4대 계속 호장을 지낸 것으로 보아 예안의 토성이라고 하겠다.후대 조선 초에 이르러
김소량(金小良)은 영주에 사는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사위가 되어 처향을 따라 영주로 이건하여 그 아들 김담(金淡)은 관이 이조판서에 이르고, 그 후손 백암(佰巖) 김륵(金玏)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안동부사를 역임한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의 안동 이거는 조선 초 원종훈에 책록된 효창(孝昌)이 안동김씨로 좌정승을 지낸 김사형(金士衡)의 사위가 되어서이다. 효창의 넷째아들 자서(自恕)가 외갓곳인 안동으로 내려와 예안 부포리에 자리잡으니 이곳은 평산김씨 500년 세거지가 되었다. 안동 예안을 중심으로 흩어져 사는 평산산씨들은 모두 이 후손이다.
도 평산신씨는 풍천면 구담리 일대에도 거주하는데 이들은 세종조에 호조판서를 역임한 사간공 신호(申浩)의 후손이다. 사간공의 7대손 관일(寬一)은 광해군 시절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처인 순천김씨가 사는 풍천으로 이거하여 후일 이조조에 김천찰방으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구담으로 돌아오니 안동 풍천, 예천 호명 등지에 사는 신씨들은 이 후손이다.
풍천임씨 임흘(任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문경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전옥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 실망하여 그들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광해군 때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봉화 용담에서 처부 진성이씨 이빙(李憑: 송재 이우의 손자)이 사는 도산 온계리로 이거하여 그 후손이 지금도 도산, 예안 지방에 살고 있다.
녹전면 녹내리에는 우계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 이의(李薿)는 문과에 급제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밀직부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사를 제수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벼슬을 버리고 처향을 따라 소백산 아래 순흥으로 퇴거하였다. 이의의 현손 이수형(李秀亨)은 문절공 김담의 사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평해서령으로 재임 중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봉화로 내여왔다. 그 손자 이영(李榮)이 현 녹내리로 이거하여 살게 되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출처:안동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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