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雄府
**안동웅부(安東雄府)의 유래**
고려말 1361년 겨울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공민왕(10년)의 몽진이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으로 오게되었는데, 풍천의 송야천에 이르러
노국공주가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자, 안동의 부녀자들이 줄지어
업드려 등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해주었다.
이것이 유래가 된 놋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에 하는
부녀자들의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으며,
공민왕은 안동 백성들의 충심에 감동되어
'安東雄府'(안동웅부)라는 현판을 써서
안동 백성들을 치하하게 되었다.
이 현판은 안동군청 현관에 계첨되어 있었으나
시.군 통합으로 군청청사를 철거하게되자
현판 원판은 안동민속박물관에 보관.전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현판을 만들어 현재 안동시청 현관에 걸었다.
따라서 안동, 영주, 봉화의 청량산성. 공민왕산성. 오마도산성 등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몽진 온 공민왕의 마지막 요새로 공민왕과 관련이 많다.
**웅부(雄府)의 뜻** 웅장하게 큰 고을
안동 사람의 마음씨
부지런한 것과 검소(儉素)한 것을 숭상(崇尙)하며
농잠(農蠶)에 힘쓰고
풍속(風俗)은 옛적 성인(聖人)들이 살던 때처럼 예스러우며
심성(心性)이 순박(淳朴)하여
인품(人品)은 둥글고 잔잔하다.
尙勤儉務農桑 務本節用 俗尙勤儉 俗古民淳 風氣渾淪
윤리와 의리에 밝고 도학을 중하게 여기며
비록 외따고 작은 마을일지라도
가는 곳마다 글읽는 소리가 자자하고
비록 못 살아 헤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단 집에 살더라도
역시 도덕(道德)과 성명(性命)을 논한다.
明倫理重道學 雖孤村殘里 軌有讀書聲 襤衣瓮窓 亦皆談道德性命矣
선비정신이 충만하여 남을 위해 희생마저도 감수하면서
순하고 어질게 살아가는 양반으로
효제(孝悌), 충서(忠恕), 신의(信義)란 유학(儒學)을 중시하며
<述而不作> 하고 <信而好古> 하나니
즉, 지어서 말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믿으며 옛것을 좋아한다.
우리의 속담(俗談)에 <양반은
①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② 아무리 추워도 잿불은 안 쬔다.
③ 대추하나로 요기(療飢)한다.
④ 그 사람 캄캄한 밤에 만져봐도 양반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렇다. 양반은 당당하며 비굴하지 않고
아무리 위급해도 당황하지 아니하며
체통을 지킬 줄 알고 물욕이 없으며
어려서도 그 모습에서
장래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자가 양반이니
그들이 바로 안동사람인 것이다.
※참고[註] 안동의 읍거지(邑居地)는
전국 굴지(屈指)의 명당인
행주형(行舟形)으로 조상(祖上)이 물려준
은혜(恩惠)받은 땅이다.
옛부터 도(道)의 웅번(雄藩)으로
살기 좋기로 으뜸이며
무협(巫峽)이 좌청룡(左靑龍),
성산(城山)은 우백호(右白虎)인데
영남산(映南山)을 주산(主山)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낙동강은 금대(襟帶)처럼 둘러
마치 은하수(銀河水)같아 그 사이에서
자고(自古)로 문사(文士)와
걸인(傑人)들은 수없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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