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예안면

침산정(枕山亭)

자즐보 2014. 11. 15. 00:19

 

 

침산정(枕山亭)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소재

 

처사 침산 이공이 학문을 닦던 곳, 근래에 새로 지었다.

 

 

 

 

 

침산정 기문

안동시에서 북쪽으로 약 七十리 거리에 오천마을이 있으니 영천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마을 서쪽 지산(芝山)의 남쪽 기슭에 정사(精舍) 한 채를 지어서 침산정(枕山亭)이라고 현판을 걸었는데

대한제국 말엽에 돌아가신 처사 침산 이공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공의 이름은 세강(世鋼)이고

간재선생(李德弘)의 九세손이다. 헌종 병오년(一八四六년)에 출생하여 七十二세까지 살다가 돌아갔으니

경술년(一九一○년)에 나라가 망하고 八년 후인 정사년(一九○七년)이었다.

 

그의 평생 경력을 셋으로 구분하여 말하면 감개(感慨)할 바가 많다.

바야흐로 초년에는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명성을 날렸으나 마침내 벼슬하는 것이 이롭지 않았으니

공자께서 또한 탄식하며 말씀하지 않았는가? 『천명을 옳게 아는 것은 어렵게 노력하여 학덕과 명망이

높아지기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바가 아닐까?』라고 하셨다.

 

중년에 미쳐서는 나랏일이 날로 어긋나서 갑신정변(甲申政變-一八八四년)으로 싹튼 것은 외적(敵)이

서로 침범함이고, 갑오경장(甲午更張-一八九四년)이 이루어지자 이에 소위 나라는 좀이 먹고

백성은 병드니 부끄러움을 알지 못함이 아니었을까?

  

말년에 이르러서는 매국노(賣國奴)가 작당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一九○五년)을 위협하여 체결하니

나라의 운세가 기우는 것 같았으며 경술년(一九一○년)에 나라가 망하자 이를 소위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한 것이 아니겠으며 후세 사람들이 망국(亡國)에 이르도록 하였을까?

 

아! 이때를 당하여 공은 비록 스스로 편안코자 아니했으나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게 되어 성(城)을 지키는

장수 같이 더욱 굳게 자신을 엄숙히 삼가 하여 참선(參禪)에 들어간 것 같았으며 더욱 두렵게 경계하여

침산에서 출입을 삼가고 아름답게 은거했다. 이에 시례(詩禮-부모의 기르침으로 깨우침)를 즐김은

그의 본업이었고 효제(孝悌)는 그의 일상 행실이었고 도의(道義)는 그의 의식의 법도였다.

  

그때 봄가을 좋은 계절에는 언덕에 올라서 시를 읊거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며

마음을 수양하기도 하고 또 무더운 여름이나 차디찬 겨울에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바람을 쐬거나

화롯가에서 눈 오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취하며 세월 따라 계절을 맞이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지냈으나 이를 옳게 말하면 즐거울 것도 없는 것이요

또한 떨쳐 일어나지 못함을 분개하여 나타낸 것이다.

일찍이 나라가 망하던 해 가을에 분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시를 읊고 통곡했고

또 왜놈들이 노인을 우대한다면서 돈을 나누어주던 날에 크게 꾸짖으며 거절하기를

저들은 음식에 달라붙은 파리나 개 같이 일종의 염치도 없는 그런 무리로다.

그렇지 않다면 천 길을 나는 봉황 같다고 하랴?』라고 비교했다.

 

대체로 공은 학문이 심오(深奧)하고 실천이 독실하고 연원(淵源)이 정통(正統)이라고

문집과 경성록(警省錄)에 상세히 기재되었으므로 이렇게 간략하게 몇 줄로 소감을 감히 기록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손(慈孫)인 기룡(起龍)군의 부지런한 부탁에 부응하고 한편으로는 본(本)을 내치고

말(末)을 취하는 사람들이 크게 반성하지 않음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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