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졸암종택
백졸암 류 직(1602~1662). 본관은 전주, 자는 정견(庭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할아버지는 류복기(柳復起)이며, 아버지는 류우잠(柳友潛)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류 직은 29세인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서사(書史)를 탐독하여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 황해도의 유생들이 그 시론(時論)을 타서 이이(李珥)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성혼(成渾)까지
문묘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소(疏)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들의 도덕이 높지 못하다고 승낙하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다시 성균관 유생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그 주장을 들고 나와, 중외(中外)가 호응하여
사론(士論)이 통일되었다고 주달(奏達)하였다.
이때에 영남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류 직은 소수(疏首)로
유생 800여 명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상소하였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류 직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때부터 류직은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부황을 해제할 것을 상소하여 벌을 모두 해제받았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문인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하였으며,
원근의 선비들과 인읍(隣邑)의 수령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다.
(자료출처:디지털안동문화대전)
백졸암 종택은 임하댐 건설로 1988년 임동면 유곡에서
현위치로 종택과 사당을 이건하였으나, 서원은 이건하지 못했다고 한다.
디딜방아에 사용한 호박돌
집을 이건할 때 디딜방아간에서 빼 온것이라고 한다.
종택의 동편에 있는 사당
양지마을 망향비
양지마는 고천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었으며
양지 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양촌(陽村), 양지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마을은 대부분 수몰되고 이곳은 새로 만든
양지마을로 그나마 몇가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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