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대홍수 영주군 일대에 215mm의 집중 폭우가 쏟아졌었다. 풍기 남원천을 가득 메웠고, 이어 영주읍 시가지를 감돌아 흐르는 서천에 이르러 아침 8시경 불바위 북쪽 제방을 붕괴시키면서 온 시가지를 물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꽃동산, 남부초등학교 방향으로 꼬불 꼬불 S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어서 집중 폭우로 유입되는 많은 양의 물을 흘러내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전 9시 30분경 당시 원당천 앞 제방 둑 50여 m를 잘라 물길을 터서 남산들(지금의 영주역) 방향으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영주 시가지는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가옥침수 1,971동, 이재민 15,319명, 전답침수 및 매몰 378정보, 도로유실 3개소 800여m, 도로파손 2개소 203m, 제방파손 2,370m, 정부양곡 침수 4,144석, 가축유실 1,479마리 등이었으며, 인명피해는 14명이 숨지고, 52명이 중경상을 입었었다.
7월 18일 기차로 영주역에 내려 현장을 둘러보았으며, 육군대학 교장인 이성가 소장을 복구사업소장으로 파견해 수해복구공사를 펼쳤다. 이 수해로 인하여 영주에 다시는 수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흥리 한절마 뒷산을 절개하여 물길을 돌리는 직강直江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본 공사에는 육군 제133공병 대대 및 해병 제1상륙사단 군인 700여명이 투입되어 수해 난지 262일만인 1962년 3월 30일 역사적인 통수식을 가졌다. 송요찬 내각수반, 버거 주한 미국대사, 멜로이 미8군사령관 등 많은 귀빈들이 참석하였다.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군사정부에서 군인과 군 장비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5억6천만환의 사업비로 공사를 마쳤다. 중앙시장 자리에 있던 영주역을 지금의 자리 휴천동으로 옮겨 新영주와 舊영주로 분리되어 새로운 시가를 형성되게 되었다. 지난날의 아픈 사건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수해복구공사 준공기념비석이 현재 구성공원에 세워져 있다. |
1962년 3월 31일 영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수해복구공사 준공식에 참석한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1961년 영주 대홍수 복구사업 전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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