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생가지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소재
조선 중기 고승 사명당(1544∼1610)이 태어난 곳으로
2006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문채
송운대사구택(松雲大師舊宅)
사랑채, 사명당(四溟堂)
四溟堂 편액이 걸려 있는 사랑채 대청
안채, 육영당(毓英堂)
분충서난문(奮忠紓難門)
충성을 분발하여 국난을 극복했다는 뜻으로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1592) 때 크게 활약한 사명대사의 일기와 상소문(上疏文),
기타 사적을 수록한 분충서난록(奮忠紓難綠)에서 따온 듯...
숙청사(肅淸祠)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을 말함.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사명대사 유허비
안내소
사명대사 유적지
충의문(忠義門)
사명대사기념관
사명대사동상
사명대사 생가지가 있는 마을인 삼강동(三綱洞)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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