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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고가(成氏古家)

자즐보 2014. 9. 30. 15:08

 

 

 

창녕 성씨고가(成氏古家)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소재

성씨고가는 안채, 사랑채, 창고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총 6동의 건물이 1만평 규모의 대지에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앞에 사랑채와 중문채를 두고, 안마당 좌우에

토담집 구조의 곳간 2동이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오른쪽...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

 

 

 

 

중문채

 

 

중문채를 들어서면 정원

 

 

정원과 연못 안쪽에 별도의 사랑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안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있다.

 

 

 

 

 

안채

 

 

 

 

 

 

 

 

 

 

 

 

 

아석헌(我石軒)

입향조 성규호 선생이 1850년대 유원면 회룡에서 이으로 옮긴 후

ㄷ자의 안채와 一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아석헌) 뜻의 아호를 당호로 삼았다.

 

 

 

 

 

청수당(淸修堂)

 

 

 

 

석운재(石雲齋)

입향조 성규호의 둘째 아들이 지은 집

 

 

 

 

 

경근당(敬勤堂)

입향조 성규호의 장남 찬영의 세째 아들 낙안이 지은 집

 

 

 

입향조 성규호 선생이 1850년대 곳에 정착하였고,

 장남 성찬영이 낙문, 낙교, 낙안 세 아들을 두었고,

차남 낙교의 아들 성유경이 6.25전쟁 당시 두 딸을 데리고

북으로 갔으니, 그 두 딸이 바로 북한 현대사의 풍운과 비극의

주인공인 성헤림과 그 언니 성혜랑이다.

성혜림은 뛰어난 미모와 발군의 연기로 북한의 인민배우급으로 발돋움했고

영화광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성혜림은 이미 소설가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해

딸(리옥돌)까지 두고 있었던 터였지만, 김정일의 강청에 따라 리평과 이혼하고 동거하게 된다.

하지만 다섯살 연상인 이혼녀 혜림과 황태자 김정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김일성)의 책망이 두려워 쉬쉬하던 끝에 김경희(김정일 여동생)의 강권에 따라

언니 혜랑과 함께 러시아로 떠나야 했다. 맏아들 김정남도 있었지만 권력은 비정했다.

모스크바에 동행했던 성혜랑의 딸 이남옥은 1992년 망명했다.

이미 모스크바에서 유학중이던 혜랑의 아들 이일남(이한영)은

1982년 10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성혜림은 1996년 잠시 스위스로 잠적했지만,

아들 김정남의 장래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곁을 지키던 혜랑은 망명했고, 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애를 마쳤다.  

조카 이한영은 1997년 2월 성남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살해당했다.

아들 김정남은 오랫동안 떠돌이 신세였고, 손자 한솔 역시 파리에

유학중이라지만 사실상 유랑 신세다. 조국을 위해 선택한 것이었지만,

북쪽에서 성유경 일가의 삶은 그렇게 처절하게 찢겨졌다.

 

 양파 시배지 유래

 

 

 

뒤쪽으로 보이는 기와집들이 모두 성씨고가 건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