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정사(寒泉精舍)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50에 소재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이 철거되었고 후에 후학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끝에 온돌방을 두었다.
우암 송시열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아명은 송성뢰(宋聖賚)이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100여 일 동안 제주시 산지골 윤계득(尹繼得)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역학 등을
강론하고,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나아가 축문을 올렸다. 또한 제주에서
『의례통고(疑禮通攷)』를 썼다. 송시열의 제주 유배 기간은 100여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주 유림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
남인들이 다시 송시열을 국문하도록 청하여 서울로 압송되던 중
1689년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이 내려졌다. 1694년(숙종 20)에
관작이 복권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송시열 유허비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
선생이 서재를 짓고 강학하였던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몸 앞면에 ‘우암송선생유허비’라 새겨 놓았다.
조선 고종 12년(1875) 선생의 후손과 유림들이 비를 세웠다.
유허비 앞 월류봉
월류봉 아래 세월을 품고 흐르는 초강천 & 월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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