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의성군

3.1독립만세운동 경북시발지

자즐보 2014. 5. 1. 21:09

 

 

 

3.1독립만세운동 경북시발지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뒷산 일명 [목단봉] 

 

의성군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발로

안평·봉양·장곡·신명·춘산면에서 4월초까지 전개되었다.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김원휘가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귀향하여 3월 6일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을 만나

서울·평양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촉구하고, 이튿날

안평면 괴산동교회 목사 박영화에게 평양의 상황을 알리고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할 것을 상의했다.

 

그리고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운동을 목격한 뒤 3월 10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대구 계성고등학교 학생인

박상동(박영화의 아들)·박영신·배달근·배중엽 등

기독교 청년들이 가담, 이들과 함께 3월 12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한편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우희원 등은 3월 11일 비안장날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2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3월 12일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4명의 주동자들이 교장실로 불려가자,

150여 명의 학생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출동한 일본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주동학생은 체포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

 

기독교인들은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여 장을 제작해,

정오에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 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3일과 16일에도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 등의 주동으로

약 1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러한 시위소식이 박영화를 통해 안평면 대사동교회에 전달되자,

김옥돈 등 대사동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3월 15일~19일에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대사동교회 집사였던

이양준이 3월 19일 도리원 장날을 기해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도리원 장터로 행진했다.

 

여기에 대사동의 해산군중도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으며,

다수의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점곡면에서는 16~20일,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3월 25일에

각 각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옛고을 比安(비안) 표지석

 

 

마을 어귀부터 도로변에 일년 365일 펄럭이는 태극기

 

 

 

기미 3.1독립만세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 표지석

 

 

 

 

3.1독립투사 기념비

 

 

 

 

기미 3.1독립운동 시발지 기념탑

 

 

 

 

 

 

임란의병장 백계 김희공 충의비

(壬亂義兵將 栢溪 金喜公 忠義碑)

 

 

 

 

 

순의사사곡박공유허비(殉義士社谷朴公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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