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헌(보물 제475호)
조선 중종 때 문신 함재 서해(徐懈,1537~1559)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전까지 고상식의 개방적인 구조가 주류를 이루었던
안동지방에 임란후 북방의 온돌방이 첨가된 것으로 양청과 온돌방의
공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는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간략한 새부리 모양의 구조를 짜았다. 누(樓)마루와 온돌방 뒤쪽으로
난간을 둘렀고 건물 안쪽은 민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지붕 맨 윗부분에 있는 재료를 받치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건물의 평면구조는 대청(앞면3칸, 옆면2칸)과 누마루(앞면1칸, 옆면2칸)가
일자로 연결되어 있고 2/3쯤 되는 곳에 온돌방(앞면2칸, 옆면1칸)이 연결되어 있는
T자형으로 특이하다. 대청과 누마루는 판목으로 만든 양청(凉廳)으로 고상식(高床式)의
개방적인 건물 전형을 보여주며, 온돌방은 저상식(低床式)의 영향으로 고상식과
저상식이 절충된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청과 누마루 사이에는 사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누마루와 방 뒤 툇마루에는 난간을 돌렸다.
소호헌에 또 다른 특징은 기와에 있다. 기와를 보면 막새와 망와에 문양이 있다.
망와에 있는 기와는 용문양이고 누마루 숫막새에는 봉황문양이, 암막새에는 용문양이 있다.
일반 건물에 이런 문양이 있는 예를 보지 못했다. 만일 조선 후기에 일반 여염집에서
용문양이 그려져 있는 막새를 사용했다면 아마도 그 집주인은
역모의 뜻이 있다하여 잡혀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든 소호헌 기와에는 이런 용문양과 봉황문양을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또한 그 문양자체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솜씨가 매우 뛰어난 장인의 작품이다.
이런 정도의 솜씨면 궁궐기와를 만들 그런 솜씨가 아닌가 한다.
이런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소호헌을 지을 당시
이 집안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청 현판 "藥峯先廬"약봉선려
대부분 집에서 기둥은 초석 위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소호헌에는
동귀틀을 상부 창방처럼 뺄목을 내어 十자로 결구하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놓았다.
솟을대문채
함재 서해의 아들 약봉 서성(1558~1631)의 태실
함재는 23살에 요절하였지만 그의 아들인 약봉은 1586년(선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곳의 관찰사를 지내고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가문을 새롭게 하였으니 약봉태실을 기릴 만 하였을 것이다.
대청에 걸려있는 藥峯胎室약봉태실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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