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도산면

퇴계종택 & 추월한수정

자즐보 2013. 5. 7. 13:22

 

 

퇴계종택(退溪宗宅)

 

 조선 중기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앞면 6칸·옆면 5칸 규모의 ㅁ자형 집으로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높은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지었으며,

전면에 솟을대문을 갖추었다.

 

 

 

 

솟을대문채, 대문은 퇴계선생의 장손인 몽재 이안도의 처 정려문(旌閭門)으로 세운것이다.

 

 

 

烈女通德郞行司溫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

열녀통덕랑행사온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

 

 

대문채 안쪽

 

 

대문채를 들어 서면 사랑마당을 앞 두고 7칸 규모의 큰 사랑채가 손님을 맞이한다.

 

 

 

 

 

 

 

 

사랑채 왼쪽 뒤에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이 연결되어 있다.

 

 

살며시 중문을 들어서 안채를 엿봤다.(사시는 분께 죄송...)

 

 

안채 중문에서 담장이 사당과 추월한수정으로 출입하는 협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협문에서 사당까지 담이 연결되어 있고, 안채와 통하는 협문이 있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

 

 

사당, 불천위 퇴계선생의 신위와 4대조 신위가 모셔져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沖齋) 권벌의 5세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며

은퇴 후 머문 곳을 찾아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정신과 소중한 가르침을 받들어 배우고,

또한 그 가르침을 영원히 후학들이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창설재는 자신의 선조가 세운 봉화 닭실의 '한수정'이름에 '추월'을 더해

'추월한수정'이라 명명했다. 또한 정자 안에 걸려 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의 현판 이름도 창설재가 명명한 것이다.

추월한수정과 인접해 있는 퇴계종택의 명칭인'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이름도 창설재가 당시에 붙인 것이다.

창설재가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안타깝게도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다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도남서원이 대원군 때 철폐되면서 성현을 모시기 위해

제단만 설치했을 때의 이름. 현재는 서원이 복원돼 있음)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도회(道會)가 열려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

지금 정자에 있는 '산남궐리 해동고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이 썼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의 제자인 홍락섭의 글씨다. 그리고 '도학연원방'은

퇴계의 15세 종손 이동은옹(98)의 숙부인 원대(圓臺) 이원태의 글씨다.

'추월한수정'과 '퇴계선생구택'은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이 썼다. 모두 복원 이후에 다시 쓴 글씨들이다.

 

 

솟을대문채

 

退溪先生舊宅 퇴계선생구택 현판

 

대문안쪽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이운재(理韻齋),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이운재의 뜻은 창설재가 지은 시 '이운재'에 잘 나타나 있다.
「보갑에 든 옥거문고(寶匣瑤琴)/ 줄이 끊어진 지 오래이네(絃絶多年)/

퇴계 선생이 멀리 이어(先生遠紹)/ 그쳐버린 거문고 소리 다시 전하였네(輟響再專)/

경전을 대한 매화창에(黃卷梅窓)/ 봄소식이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幾回春信)/

힘쓸지로다 후생들이여(勖哉後生)/ 오히려 여운을 다스려보세(尙理餘韻).」

거문고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성인의 도학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상징한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진시황 때 분서갱유로 단절돼 그 글만 복원돼 전해오다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송나라 때 정명도·정이천 형제가 공자의 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밝혀내게 되었고,

남송 때 주자가 집대성함으로써 공자의 도학이 새롭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주학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왕 때 회헌(晦軒) 안향에 의해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년이 지난 뒤 퇴계에 이르러 정주학이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을

창설재는 퇴계가 끊어진 거문고 소리를 다시 이었다고 비유하면서, 그 여운을 받아

다스리자는 뜻으로 이운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해동고정(海東考亭), 산남궐리(山南闕里)

산남궐리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강학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온 것으로, 퇴계를 기리는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패당(玩佩堂)

 

추월한수정의 대들보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볼 때 시제를 걸던

나무를 100여 명의 인부가 운반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래 전면에 유리문이 없었다. 여름엔 모기장,

겨울엔 두터운 비닐을 쳐두었는데 아예 유리문을 달았는 모양이다.

 

추월한수정의 뒷편

 

 

사당의 옆 모습

 

뒷편 산자락에서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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