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서후면

소계서당(邵溪書堂)

자즐보 2013. 4. 30. 09:49

 

 

 

소계서당(邵溪書堂)

 

서후면 금계리의 학봉종택에서 약 100여m 건너에 있다.

학봉종택에서는 1762년에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종택을 새로 짓고,

현 종택 자리에 소계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는데,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구 종택의 사랑채가 현 소계서당이 되고,

구 소계서당이 현 종택의 사랑채가 된 것이다.

 

학봉선생의 후손 서산 김흥락이 『소계서당기』를 저술하여

그 사정을 전하고 있다. 김흥락은 퇴계 이황의 뛰어난 제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으로서 가문의 학문적 전통이 깊었다.

 

 

나즈막한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소계서당

좌측이 소계서당, 가운데 광(창고), 오른쪽 살림집으로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소계서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후대에 돌로 설치한 듯...

 

 

소계서당(邵溪書堂)

 

 

대청마루 벽에는 김흥락 선생의 호를 딴 서산(西山)이란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뒤쪽으로 협문을 두어 사당으로 통한다.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광(창고), 각종 농사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겠지...

 

 

 

ㄷ자로 배치된 살림집,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랄까...

 

 

       

김흥락(金興洛, 1827~1899)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1872년 안동부 금계리에서 부친 김진화(金鎭華)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어머니 여강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뛰어난 제자였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1대 종손으로 가문의 학문적 전통이 깊었다.
학맥으로 말하면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손재 남한조-정재 류치명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파 학통의 정맥을 이어받아 한말에까지 계승한 인물이다.

일찍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6세 때, 재종숙(再從叔) 유계(酉溪)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림 속의 새를 보고는

“나르면 장차 하늘을 찌르고 울면 장차 사람을 놀라게 하리라.[飛將衝天鳴將驚人]”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호방한 기개를 보였다고 한다.

가문에 전해오는 학문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이루어 나가던 그는 15세에는 이황의 가문인 진성(眞城) 징암(懲庵) 이만억(李晩憶)의

딸에게 장가든 인연으로 선배인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과 교유하였는데 신암으로부터 퇴계 선생이 경연에 나아가 강의할 적에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옥으로 만든 서진(書鎭)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 해에 이미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심경은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성리학의 기본 수양서로 퇴계 이황도 평생토록 존중하고 믿었던 책이다.

그 즈음에 김흥락은 타고난 호방한 기품을 접고,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안을 향한 심성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하여 16세 되던 해 섣달 그믐날[除夕]에 “나이는 들어가는데 학문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내가 이에 진보하지 못할까 탄식하노라?”

라는 시를 지었다.

17세 때는 성현의 격언을 뽑아 『제훈집설요람(諸訓集說要覽)』을 꾸미면서 정자(程子), 주자(朱子), 퇴계(退溪)의 말씀 속에 경(敬)에

관한 조목을 모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이 보고 깨달은 바를 적었다. 그는 이때 이미 마음을 성찰하고 기르는 원리와 방법을 세워가고

있었다. 그는 성현의 수많은 말씀 중에 경(敬)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뜻을 굳게 세우며, 마음을 평탄하게 지키고, 동작은 편안하고

침착하게 하며,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하여 수양하는 자세의 여러 조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나아가 또 심지는 푸른 하늘 밝은 달과 같아야 하고 위의는 태산과 같이 장중하고 우뚝하여야 한다. 독서는 다른 뜻을 깊이 구하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다.

19세에 청성서원의 강회에 갔다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스승을 뵙거나 서간을 통하여 스승이 돌아가신

1861년 35세 때까지 경학(經學), 성리설, 수양론, 가례(家禮) 등의 문제를 품의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그가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경(敬)에 관한 공부였다. 그는 스승과 더불어 대산 이상정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에 관해 깊이 토론하였다.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성리학에 있어서 심성수양론의 실천에 관한 기본적 글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노재(魯齋) 왕백(王栢)이 「경제잠도(敬齋箴圖)」를 만든 것을 퇴계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속에 수록하여

경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퇴계 학파의 주된 흐름 속에서 이러한 경의 ‘마음가짐’과 그 실천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규명하고자

 경(敬)과 「경재잠」에 관한 방대한 설을 모아 『경재잠집설』을 편찬하였다.
김흥락 또한 같은 맥락에서 『경재잠집설』을 스승 정재, 선배 이만각과 토론하였으며, 그 자신이『경재잠집설도(敬齋箴集說圖)』를

그렸던 것이다. 이를 통해 경에 관한 공부가 그의 일생과 학문 체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김흥락의 학문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이나 저술은 비교적 적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28세 무렵 그의 학문에 있어 의미있는 저술을

편찬하고 글을 짓는다. 그가 편찬한 『졸수요결(拙修要訣)』은 성찰하고 수양하는 방법과 절차를 규정한 것이었다.

그 즈음에 지은 「주일설(主一說)」은 경(敬)에 관한 설명인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주일(主一)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마음과 실천 행위가 일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같은 해 김흥락은 그의 학문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입학오도(入學五圖)」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학문의 방법을 입지(立志),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4가지 기본틀로 규정하고 이 4가지 기본틀이 지니는 유기적 상관관계를 「총도(總圖)」로

그려 밝히고 있다.

김흥락은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부친 김진화에게 “요즘 공부는 사람 망치기 쉽습니다.”라고 고하였다고 한다.

이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직 내적 심성 공부의 향상을 바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는 뜻을 보이자

과거 공부에 힘을 써서 24세 때 한성 증광시를 보았다. 그러나 그 뒤로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40세 때 어사 박선수가 지방에 벼슬하지 않고 숨어 있는 인재(遺逸)로서 천거해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조봉대부사옹원

주부(朝奉大夫司甕院主簿)를 제수 받았다가 얼마되지 않아 경상도사(慶尙都事)로 이임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56세 때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 받았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고, 68세 때는 승문원우부승지(承文院右副承旨)와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학문의 길로 정진하였다.

김흥락은 52세 때 복병산 아래 서산재(西山齋)를 짓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안동 인근의 여러 곳에서 열리는 강회에서 강의를 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며 지냈다. 그는 당시 안동 인근에서 가장 두터운 신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1890년 안동읍에 백성의 폭동이 일어나 위태로워지자 향읍의 사람들 모두가 그가 나서서 진정시키기를 바랐다. 그가 나서자 시장을 닫았던 사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읍민 가운데 피하였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선생이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살았다.”고 하였다. 김흥락이 지주들에게, 대저 백성의 정이란 순리에 따르면 쫒고 어그러지면 거스르는 것이니 민정에 순응해야 한다고 꾸짖어 깨우치고, 향당에 나아가 각 면의 장을 불러 대의와 사리로써 깨우치니 백성들이 모두 믿고서 해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점점 다가드는 개화의 물결을 전통을 지켜가는 보수의 입장에서 배척하였다. 어사가 『황준헌사의(黃遵憲私議)』,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을 보내왔어도 보지도 않고 준엄하게 사양하여 돌려보냈다.

김흥락은 을미사변(1895년) 때 의병을 일으키려고 여러 유림들과 논의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조칙에 따라 중단한 뒤

주변의 권유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시대의 격변을 외면하며 너무나 고요히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척사위정론자(斥邪衛正論者) 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고 이처럼 침묵하였던 것은, 그의 학풍이 척사의리론(斥邪義理論)의 경향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퇴계 학파 학풍의 한 갈래로서 심성수양론의 내향성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문의 전통으로나 학맥의 전통으로나 그 전통을 짊어지고 갈 운명을 지닌 김흥락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한계이었는지도 모른다.

1899년 10월 병이 위중해진 김흥락은 나라의 문호를 보존하여 지켜가는 방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주역 기제괘(旣濟掛) 육사(六四)의

효사(爻辭)를 인용하여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어 오를 때 헌 옷가지로 막아 물이 새지 않도록 하여야 함과 같다.”고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내가 서산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서산이라고 하였으나 하늘이 주신 병옹(病翁)이라는 호가 옳다.

벼슬에는 한 번도 나아간 적이 없으니 관직을 쓰지 말고 ‘징사 문소 김공’이라고만 하라.”고 말한 뒤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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