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계서당(邵溪書堂)
서후면 금계리의 학봉종택에서 약 100여m 건너에 있다.
학봉종택에서는 1762년에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종택을 새로 짓고,
현 종택 자리에 소계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는데,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구 종택의 사랑채가 현 소계서당이 되고,
구 소계서당이 현 종택의 사랑채가 된 것이다.
학봉선생의 후손 서산 김흥락이 『소계서당기』를 저술하여
그 사정을 전하고 있다. 김흥락은 퇴계 이황의 뛰어난 제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으로서 가문의 학문적 전통이 깊었다.
나즈막한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소계서당
좌측이 소계서당, 가운데 광(창고), 오른쪽 살림집으로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소계서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후대에 돌로 설치한 듯...
소계서당(邵溪書堂)
대청마루 벽에는 김흥락 선생의 호를 딴 서산(西山)이란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뒤쪽으로 협문을 두어 사당으로 통한다.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광(창고), 각종 농사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겠지...
ㄷ자로 배치된 살림집,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랄까...
김흥락(金興洛, 1827~1899) |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1872년 안동부 금계리에서 부친 김진화(金鎭華)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어머니 여강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퇴계 학파 학통의 정맥을 이어받아 한말에까지 계승한 인물이다. “나르면 장차 하늘을 찌르고 울면 장차 사람을 놀라게 하리라.[飛將衝天鳴將驚人]”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호방한 기개를 보였다고 한다. 딸에게 장가든 인연으로 선배인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과 교유하였는데 신암으로부터 퇴계 선생이 경연에 나아가 강의할 적에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옥으로 만든 서진(書鎭)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 해에 이미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심경은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성리학의 기본 수양서로 퇴계 이황도 평생토록 존중하고 믿었던 책이다. 그리하여 16세 되던 해 섣달 그믐날[除夕]에 “나이는 들어가는데 학문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내가 이에 진보하지 못할까 탄식하노라?” 라는 시를 지었다. 관한 조목을 모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이 보고 깨달은 바를 적었다. 그는 이때 이미 마음을 성찰하고 기르는 원리와 방법을 세워가고 있었다. 그는 성현의 수많은 말씀 중에 경(敬)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뜻을 굳게 세우며, 마음을 평탄하게 지키고, 동작은 편안하고 침착하게 하며,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하여 수양하는 자세의 여러 조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다. 1861년 35세 때까지 경학(經學), 성리설, 수양론, 가례(家禮) 등의 문제를 품의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그가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경(敬)에 관한 공부였다. 그는 스승과 더불어 대산 이상정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에 관해 깊이 토론하였다.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성리학에 있어서 심성수양론의 실천에 관한 기본적 글이다. 경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경(敬)과 「경재잠」에 관한 방대한 설을 모아 『경재잠집설』을 편찬하였다. 그렸던 것이다. 이를 통해 경에 관한 공부가 그의 일생과 학문 체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편찬하고 글을 짓는다. 그가 편찬한 『졸수요결(拙修要訣)』은 성찰하고 수양하는 방법과 절차를 규정한 것이었다. 그 즈음에 지은 「주일설(主一說)」은 경(敬)에 관한 설명인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주일(主一)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마음과 실천 행위가 일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4가지 기본틀로 규정하고 이 4가지 기본틀이 지니는 유기적 상관관계를 「총도(總圖)」로 그려 밝히고 있다. 이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직 내적 심성 공부의 향상을 바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는 뜻을 보이자 과거 공부에 힘을 써서 24세 때 한성 증광시를 보았다. 그러나 그 뒤로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주부(朝奉大夫司甕院主簿)를 제수 받았다가 얼마되지 않아 경상도사(慶尙都事)로 이임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주변의 권유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시대의 격변을 외면하며 너무나 고요히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나아가기 보다는, 퇴계 학파 학풍의 한 갈래로서 심성수양론의 내향성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문의 전통으로나 학맥의 전통으로나 그 전통을 짊어지고 갈 운명을 지닌 김흥락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한계이었는지도 모른다. 효사(爻辭)를 인용하여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어 오를 때 헌 옷가지로 막아 물이 새지 않도록 하여야 함과 같다.”고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벼슬에는 한 번도 나아간 적이 없으니 관직을 쓰지 말고 ‘징사 문소 김공’이라고만 하라.”고 말한 뒤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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