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문소(求門沼)
* 천연기념물 제417호 *
태백 황지천 구문소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중심으로 한 태백고원의 태백시가지를 북쪽 함백산(1573m),
서쪽 태백산(1567m), 동쪽 연화산(1171m)과 남쪽 구문소 부근에서
도강능선(渡江稜線 580m)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태백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 능선으로 완벽하게
한 바뀌 둘러쳐진 평균 해발 700m의 고원분지 도시이다.
때문에 구문소는 태백의 배설구이며 숨통 역할을 동시에 한다. 구문소는
이 지방 방언으로 구멍에 있는 물 웅덩이라는 뜻으로 구무소라 불리기도 한다.
옛적 영남인 들은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벌통 같은 곳에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낙동강 물길을 따라 발원지를 찾아 오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보니 암릉으로
막혀 있었다. 상상도 못해 본 거대한 바위물구멍으로 강물이 흐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에는 신령한 기운이 감돌았다. 암릉으로 막혀버린 벌통 안쪽에는
권세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을 타고 쉽게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다만 날 수 있는 새들만이 쉽게 날아 들 수 있다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천(穿川)이라 구멍 뚫린 하천이 있다했고,
또 정감록에 기록된 대로 신(神)이 허락하는 자시(子時)에 열리고 축시(丑時)에 닫힌다했다.
바위구멍 안쪽 바위벽에 뚜렷이 새겨진 글자 그대로 오복동천자개문(五福洞天子開門)을
통과하면 삼재(三災 전쟁, 기근, 질병)가 들지 않고 필시 인간세상이 아닌 이상향인
복사꽃 떠가는 무릉도원이 있노라 했겠다. 삼재로 인간 세상은 늘 불안에 떨고
부귀권세의 탐욕으로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이 인간세상 아닌가?
세상만사 마음대로 될 것이면 종교가 왜 생겼겠는가? 때문에 구문소는
神이 허락하는 자만이 들어 갈수 있는 곳이라 한자표기로 단순한
구문소(口門沼)가 아닌 구문소(求門沼)라 표기하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깊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아주 오랜 옛날 황지천을 따라 흐르던 강물은 사군다리 쪽으로 돌아서
마리거랑으로 흘렀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물이 크게 불어나자
화전동 싸리밭골에서 엄청나게 큰 싸리나무 한 그루가 떠내려 왔다.
싸리나무는 지금의 구문소가 있는 석벽 부근에 다다르자 사군다리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지 못하고 그만 석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우르르 쿵’ 하는
큰 소리가 나고 석벽에 큰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군다리 쪽으로 돌아
마리거랑으로 흐르던 강물은 이 구멍을 지나 곧 바로 흐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물길이 만든 자연적 동굴과 사람이 만든 인위적 굴
오복동천자개문(五福洞天子開門)
이 문에 들어서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삼재(전쟁,기근,질병)가 없는
무릉도원이라는 뜻의 글자가 굴 안쪽 암벽에 음각되어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 1807~1863)의 시 한 수...
山慾渡江江口立 (산욕도강강구립) 산은 물을 건너려고 강가에 서 있고
水將穿石石頭廻 (수장천석석두회)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 머리를 돌아가네
山不渡江江口立 (산불도강강구립)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해 강가에 서 있고水難穿石石頭廻 (수난천석석두회) 물은 돌을 뚫기 어려워 돌 머리를 돌아가네
구문소 좌측 태백시로 들어가는 도로의(상행) 굴은
일제가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뚫었다고 한다.
그 옆에 최근 도로확장을 하면서 태백에서 나오는(하행) 터널을 뚫었다.
태백지역 관광을 반기는 구문소 삼거리의 장승들...
구문소의 전설
구문소 상류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물이 석회암 하천을 흐르며 작은 폭포를 이룬다.
구문소 삼형제 폭포
구문소 위쪽에 3개의 폭포가 나란히 쏟아지는 곳이 삼형제폭포다.
황지천의 물이 이곳에 와서 세갈래로 갈라지며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옛날 폭포 윗쪽에서 삼형제가 물놀이를 하다가 떨어져 익사하며 삼형제가 다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때 삼형제 용이 승천하며 바위절벽을 치고 올라가서 생긴 것이 바로
삼형제폭포라 한다. 선조 4년(1571)에 경상감사가 12월 18일 진시(辰時)에
낙동강 상류의 물이 끊어 졌다고 장계를 올려 보고하자 이때부터 민심이 흉흉해졌다.
전하는 말에 낙동강의 물이 끊기면 국가에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다.
이것을 낙동강의 절류(絶流)라 하며 지금의 용소(龍沼)위에 있는 삼형제 폭포의
물이 끊겨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그 후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와 강토를 유린하자 백성들은 구문소의
영험함을 확인하였고 신령스런 곳으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구문소 자연학습장
고생대 화석들과 5억년전 바닷가의 다양한 지질구조 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현재 자연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관광단지로 조성하고 있다.
천천(穿川) - 權萬(권만,1688~1749)의 글
좁고 답답한 골짜기는 귀신 도끼질로 뚫은 것이 틀림없는지라
돌문은 둥근무지개 모양으로 뚫린 골짜기에 걸려 있네
천둥치듯 소리내며 오랜 세월 동안 세갈래 폭포는 쏟아 졌고
눈처럼 하얗게 물보라 일며 천길 아래에서 한줄기 냇물로 흘러 갔네
용의 기운은 웅덩이에서 비를 뿌리려고 비릿한 입김을 뿜어데지만
햇빛은 절벽에서 이는 물안개로 하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네
사람들이 제 아무리 담이 커 겁이 없다해도 마유산 꼭대기에 있는 벌통에는
오직 날 수 있는 새들만이 날아 들고 있을 뿐이네
구문소 부근의 석회암
각 종 퇴적구조와 다양한 생물화석이 나오고 있어
하부고생대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관찰할 수 있다.
건열구조가 남아있는 바위
물결흔이 남아있는 바위
스트로마톨라이트
새눈 구조가 남아있는 바위
소금흔이 남아있는 바위
두족류 및 부족류의 화석이 남아있는 바위
자개루(子開樓)
자개루는 구문소 바로 위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마당소, 삼형제폭포, 닭벼슬바위 등 구문팔경을 볼 수 있다.
구문소의 몇 가지 전설
첫 번째 이야기
아주 오랫 옛날에 구문소로 흐르던 강물이 사근다리 쪽으로 돌아서 마리거랑으로 흘렀다.
어느때 큰 홍수가 나서 물이 크게 불어났다. 이때 화전동(禾田洞)의 싸리밭(추전)골에서 엄청나게 큰 싸리나무가 떠내려 오다가 이곳 구무소의 석벽(石壁)부근에서 사근다리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지 못하고 그대로 구무소의 석벽을 강타(强打)하여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큰 구멍이 뚤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근다리쪽으로 돌아 말거랑(마리거랑)으로 흐르던 강물이 이 구멍으로 곧 바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사실 구문소는 유로변천의 좋은 본보기이며 사근다리쪽의 모래밭은 이를 증명한다.
두 번째 이야기
옛날 온 세상이 물바다로 되었을 때 태백산 아래의 황지, 장성 일대도 물에
잠기어 있었다. 그때 하우씨(夏禹氏:中國三星五帝)의 한 사람으로 檀君께 治山治水의 法을 배웠음)가 나타나 이곳 구문소의 산을 칼로 찔러 뚫어 물이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구문소 옆의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뚫은 인공굴(人工窟) 위쪽 석벽에 새겨놓은 우혈모기(禹穴牟寄)라는 글씨가 바로 두 번째 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다.
세 번째 이야기
옛날 구문소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는 석벽(石壁)을 사이에두고 동쪽에는
철암천(鐵岩川)이 큰소(沼)를 이루어 그 소(沼)에 청룡(靑龍)이 살고 있었고, 서쪽에는 황지천(黃池川)이 큰 소(沼)를 이루고 그 소(沼)에 백룡(白龍)이 살았다고 한다. 두 용은 서로 낙동강(洛東江)의 지배권을 놓고 항상 다투었다. 매일 석벽 꼭대기에서 싸움을 하였는데 항상 뇌성이 일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천지를 분간치 못하였고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느날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 위에서 싸우다 내려와 석벽 밑을 뚫으며 공격을 하여 청룡을 물리치고 그 여세로 승천(昇天)하였다고 한다. 백룡이 승천할 때 지나간 산을 용우이 산이라 하는데 구무소 앞에 솟은 산이다.
이밖에도 몇 가지 전설이 더 있으나 앞에서 말한 세가지 전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구문소가 형성될 때의 이야기이며 그 밖에 구문소에는 용궁을 다녀온
엄씨 전설과 신라때 효도왕자 전설이 있다.
용궁을 다녀와 부자가 된 이야기
옛날 구무소 옆에 엄종한(嚴宗漢)이라는 사람이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구무소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그물을 쳐 놓은 곳에 가보니 그물이 없어져 버렸다.
엄씨는 이리저리 그곳을 찾다가 실족하여 그만 물에 빠져버렸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는데 그곳은 구무소 밑에 있는 용궁으로
용왕이 사는 곳이었다.
용궁군사들에게 잡혀 용왕에게 끌려간 엄씨는 용왕에게 문초를 받게 되었다.
“네놈이 엄종한이냐.”
“예”
“너는 무엇 때문에 남의 닭을 잡아가느냐?”
“소인이 어찌 용왕님의 닭을 잡아 가겠읍니까?, 그럴리 없읍니다.”
“저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하는 구나, 네놈이 아침 저녁으로 잡아 가는 닭을
아니 잡아갔다니 고얀놈!”
엄종한은 그동안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이었음을 간파하고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왕님 정말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하오나 그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아 살림이 어려운지라
그만 용왕님의 닭인줄 모르고 그것을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였아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용왕님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삼일 동안 잘못을 비니 그제서야 용왕이 노여움을 풀며
“그래 듣고보니 그대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로다. 모르고 한짓이니 차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며 주연(酒宴)을 베풀어 위로 하였다.
용궁의 산해진미를 맛보고 융숭한 대접을 받던 엄시는 집에 두고온 부모님과 자식이 생각이 나서 먹던 떡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주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용왕이 흰강아지 한 마리를 주며 강아지 뒤를 따라 가면
인간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강아지를 따라 물 밖으로 나오니 강아지는 죽어버렸고 구무소 가에는 무당의 굿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때 무당이 구무소에서 엄씨의 넋을 건지기 위해 닭을 물에 집어 던졌으나 죽지 않기에
엄씨가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럴 때 물밑에서 엄씨가 살아 나온 것이다.
모여섰던 사람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혼비백산하였으나 엄씨는 “나요. 엄종한이요. 귀신이 아니요.”
하였다 늙으신 어머님이 그 목소리를 알아 듣고 내 아들이라 하였다.
엄씨가 용궁에서 용왕에게 3일동안 빌며 보낸 시간이 지상에서는 3년이라 세월이 지나간 것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엄종한은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대로 굳어 딱딱한 차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엄씨는 그 돌을 무심코 빈 쌀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엄씨의 아내가 쌀독을 열어보니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엄씨의 아내는 쌀을 몇 바가지 퍼내 보았으나 쌀독의 쌀은 줄지 않고 그대로 였다.
아무리 쌀으 퍼내도 줄지 않는 쌀독은 화수분이 되어 있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엄씨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때 한양조씨에게 시집간 딸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 아버님이
용궁 갔다 와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
쌀독에 넣어둔 백병석(白餠石)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큰일나니 안된다고 하였다.
하도 며칠만 빌려 달라는 딸의 간청에 못이겨 친정 어머니는 엄씨 몰래 백병석을 빌려주고 말았다.
얼마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이상히 여긴 엄씨가 백병석을 찾았으나 딸이 가져간 뒤였다.
친정어머니가 딸의 집에가서 백병석을 달라고 하였으나 번번히 가짜 백병석을 내놓았다.
일설에는 조씨가 엄씨집에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하며 백병석을 훔쳐 대현리에 살다가
처가집에서 자꾸 백병석을 찾으러오니 안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현리에 살던 딸이 친정 부모 몰래 백병석이 들어있는 쌀독을 훔쳐 이고
구무소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백병석은 다시 용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쨋든 조씨네는 백병석을 가지고 안동 땅 모시밭으로 이주하여 가서 잘살게 되었고
엄시네는 몰락하였다고 한다.
신라때 효도왕자 전설
신라 선덕여왕의 아들 효도왕자(孝道王子)가 봉화군 재산면으로 유람왔다가 백정의 딸인
월선(月仙)이란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서라벌에서 사신이 와 선덕여왕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을 전했다.
효도왕자는 월선에게 금비녀를 하나 건네주며 정표로 간직하라고 말한뒤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며 떠나갔다.
그 뒤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던 월선은 혹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왕자가 변심한 것은 아닐까 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봄 서라벌의 효도왕자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오월 단오에 동점동에 있는 구무소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월선은 재산면에서 길을 떠나 구무소로 오다가 춘양면 의양리에 비녀소(沼) 가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곳에서 월선은 왕자가 사랑의 정표로 준 금비녀를 꺼내어 들고 만지며 왕자생각을 하였다.
그때 갑자기 개천물이 소용돌이 치며 바람이 크게 불어서 월선은 그만 금비녀를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깊은 소(沼)에 빠진 금비녀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월선은 하는 수 없이 비녀를 찾지 못한채 구무소로 와서 효도왕자를 만나서 금비녀를 잃어버린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정표로 준 물건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월선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놀라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월선은 죽기로 결심하고 치마를 뒤집어 쓰고 구무소에 뛰어 들었다.
구무소 깊숙히 빠진 월선은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모래밭 위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구무소 물밑의 수중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춘양 비녀소에서 일어버린 금비녀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월선의 지극한 사랑을 하늘이 감동하여 이러한 기적을 낳게 한 것이다.
월선은 금비녀를 건져 품에 품고 서라벌로 효도왕자를 찾아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춘양의 비녀소는 월선이 금비녀를 빠뜨린 곳이라해서 비녀소라 불렀으며, 그곳과 구무소는
직선거리로 50리 정도 되는 거리인데 땅 속으로 통하여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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