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농암 이현보(1467-1555)

자즐보 2011. 12. 13. 21:55

 

농암 이현보(1467-1555)

 

농암(聾巖) 이현보는 행복한 삶이 뭔지 알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할 명예를

포기할 줄 알았던 인물이라 하겠다. 끝없이 벼슬을 추구하는 이들과 달리, 그는 자연을 더 즐기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손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릴 줄 알았다. 덕분에 그는 누구보다

복된 삶을 오래도록 누리다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다.

◆  이현보 약력 
    *1467년 안동 출생, 1485년 향교 입학

   *1495년 생원시 합격, 1498년 문과 합격, 1507년 사헌부 지평, 1508년 영천 군수

   *1545년 기로소(耆老所) 입소

   *1549년 '어부가' 지음, 숭정대부 품계 하사

   *1555년 긍구당에서 별세, 1557년 시호 '효절(孝節)', 청백리 선정


◆ 일흔 넘은 나이에 부모앞 '때때옷 재롱'
농암의 효행은 너무나 유명하다. 농암은 46세때인 1512년 고향집 옆 분강(汾江: 낙동강) 기슭의

농암 바위 위에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지은 후, 명절때면 이곳에서 때때옷 차림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는 등 정성을 다했다. 애일당의 '애일'은 '부모가 살아계신 나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수많은 정자가 지어졌지만, 이렇게 효를 실천하기 위한 정자를 지은 것은 드문 일이다.

농암은 부모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노인들을 각별히 모셨다. 그는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포함해 아홉 노인을

모시고 어린 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즐겁게 해드렸는데, 당시 농암 자신은 이미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효자 중 한 사람으로, 일흔 나이에 부모 앞에서 무늬 옷을 입고 재롱을 부린

주나라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한 것이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고, 이런 효행이 조정으로 알려져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시를 보냈다.

그리고 이 일은 후일 선조가 농암 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애일당구로회의 풍속은 400여년간 전승되었다.

1519년 중구일(음력 9월9일)에는 안동부사 신분으로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한자리에 초청해 경로잔치를 벌였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라 했다.

이 잔치에는 여자와 천민도 가리지 않고 초청했다는 점에서,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농암의 열린 사고와 차별없는 인간애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퇴계가 쓴 농암 행장의 '자제와 노비를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접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기록과도 부합하는 내용이다.


30여년 고을 수령…임지마다 주민 유임 요청
농암은 출세 욕심을 버리고 시골의 양친을 더 잘 모시기 위해 언제나 지방근무를 자청했다.

무려 8개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로 근무하는 동안 농암은 청백리의 모범을 보였다.

고을 백성들은 그가 다른 고을로 임지를 옮길 때마다 붙잡고 눈물을 흘렸으며, 좀 더 있게 해달라고

관찰사나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해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중종실록)

'경상도 관찰사 김당이 아뢰기를 "…신이 이 고을(성주)을 살피러 가니, 고을사람들이 길을 막고

이현보를 유임시켜주도록 지성스럽게 청했습니다."'(중종실록)

'충주 목사에 임명됐다. …번거롭고 가혹한 세금을 개선했다. 잘 다스려 백성들이 기뻐했고,

이곳(충주)을 떠나던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퇴계의 '농암 행장')

이렇게 외직을 자청해 근무하다 부모가 별세하자 은퇴를 요청했다. 매번 임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그는 76세가 되어서야 병가를 얻어 낙향할 수 있었다. '이현보는 영달을 좋아하지 않고,

자주 부모를 위해 외직을 구했다. 드디어 부모가 돌아가시자 직위가 2품이고 건강도 좋았지만,

조정을 떠나기를 여러 차례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식자들은 그를 만족을 아는 지족지지(知足之志)의

식견이 있다고 했다.'(중종실록)


유일하게 정계 은퇴식…종종 '금포' 하사
1542년 농암의 은퇴가 결정되자 중종은 친히 농암을 접견하고 관복 띠인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했다. 이 시기는 사화(士禍)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석했다.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 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졌다. 회재 이언적은 장문의 전별시를 지었으며, 모재 김안국과

충재 권벌은 한강까지 나왔고, 주세붕은 죽령에서 농암을 맞이했다. 퇴계 이황은 이날 배를 타고 따라가면서

시를 바쳤다.

구저(苟全) 김중천(1567~1629)은 농암의 정계은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아! 선생의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고, 벼슬과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 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 소광(疏廣)·소수(疏受)와 당나라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 천년을 내려왔는데, 유독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광·소수·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한 것이다.

회재·충재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퇴계께서 시를 지어 작별했으니, 소광·소수가 떠날 때의 100량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농암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지었다는 뜻의

'효빈가'를 지어 소회를 읊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하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농암은 일찍부터 벼슬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했다. 영천 군수로 있던 1510년,

잠시 휴가를 내 고향 예안을 찾아 긍구당의 남쪽에 명농당(明農堂)이라 작은 집을 짓고

벽에 귀거래도를 그려 낙향을 다짐했던 것이다.


낙향후 퇴계 등과 어울리며 강호 즐겨
낙향한 농암에게 임금은 여러 번 벼슬과 선물을 내리며 다시 올라올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매번 벼슬을 사양했고, 하사받은 책과 선물은 주변에 나눠주었다. 만년의 그에게 한양의 벼슬은

별 의미가 없었고, 고향 분강촌에서 자연을 벗삼으며 회재와 퇴계 등 선비와 어울리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던 것이다.

은퇴 후 농암은 농부로 자임하고 일개 서생과 다름 없는 담백한 생활을 하며 '유선(儒仙)'으로 불리었다.

분강의 강가를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유유자적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이런 감흥과 미의식은 그대로 '어부가(魚父歌)' '농암가(聾巖歌)' 등 문학과 예술로 승화되었다.

퇴계는 '어부가'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며 고향 분강촌(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을 사랑했다.

고향에서 자연을 벗삼는 즐거움을 노래한 그는 한국문학사에 '강호문학의 창도자'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는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고 오직 유유자적하게 살았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7형제)을 돌아보며 "나이 90이

되도록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고, 너희들도 모두 잘 있으니 전혀 유감이 없고 죽어도 영광이다.

슬퍼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장례를 검소하게 할 것을 당부한 뒤 눈을 감았다. 


농암 불천위이야기
경북지역의 대부분 불천위가 그렇듯 농암 불천위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 것은 없다.

농암의 17세 종손 이성원씨의 말이다. 다만 농암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천위가 되고,

후손이 4대 봉사(奉祀)에 이어 불천위 제사를 지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농암 불천위 제사(음력 6월12일)는 기일 자시(子時)에 시작하며, 제관은 30~40명 참석한다.

제사 절차 중 조상이 음식을 드는 순서인 '합문부복' 전에 재배하는 점이 다른 불천위 제사와 다르다.

아헌(亞獻)은 예전에는 종부가 맡았으나 요즘은 문중 좌장이 하고 있다고 한다. 불천위 제사는 현재

농암종택(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사랑채 대청에서 지낸다. 불천위 신주는 종택 내 사당에

4대조 신주와 함께 봉안돼 있다.

종손 이성원씨는 "농암 선조는 효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명예와 인기를 한몸에 받을 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은퇴해 고향에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게 보낸 점을 더 높게 사고 싶다"며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그 분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본채와 사당, 긍구당(肯構堂) 등으로 이뤄진 현재 종택은 2002년에 준공됐다.

긍구당과 사당은 도산서원 근처 분강촌(분천리)의 옛 종가 건물을 이전해온 것이고,

본채(안채와 사랑채)는 새로 지은 건물이다. 긍구당은 농암의 고조가 처음 지었고,

농암이 중수해 긍구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이어간다'는 의미다.

농암은 이 집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임종을 맞았다.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08년 마무리된 현재의 종택 일대 농암 유적으로 긍구당을 비롯해

애일당(愛日堂), 강각(江閣: 농암이 자연을 벗하기 위해 지은 정자), 명농당(明農堂: 농암이 낙향을 생각하며

지은 집), 분강서원(汾江書院: 사림이 농암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699 건립), 농암신도비(籠巖神道碑) 등이

이전·복원돼 있다.

 

▼ 농암종택, 영천이씨 안동입향조 이헌公(농암의 고조부)이 1370년 지음.

농암 이현보 선생이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직계자손들이 650여 년 대를 이어 살아왔다.

 

 

▼ 긍구당(경북유형문화재 제32호), 농암선생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곳.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 종택의 중심건물로 모든 문사가 이곳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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