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입암 류중영(1515-1573)

자즐보 2011. 12. 10. 13:20

 

입암 류중영(1515-1573)

 

안동 하회마을의 인물로 겸암(謙菴) 류운룡과 서애(西厓) 류성룡 형제를 아는 이는 많아도,

그 아버지인 입암(立巖) 류중영(1515~73)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겸암이 중앙 각 부처의 관리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지방행정관으로 훌륭한 치적을 남기며,

서애가 국가경영전략을 잘 수립·수행해 전례 없는 국난을 극복한 능력과 인품의 근원은

입암에게 있다 하겠다.

입암은 평생 정직과 성실에다 넓은 아량을 바탕으로 벼슬생활을 하고 일상을 살았다.

자식들이 본받음은 물론 모두가 추앙할 만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글 '자기 양심을 속이지 말라(毋自欺賦)' 중 일부다.

'나가고 들어감에 일정함이 없으니/ 간혹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도 하네/ 나쁜 것은 숨김으로 몰래 점점 더 자라나고/ 착한 것은 사물을 접하며 도리어 감소되네/ …뜻은 항상 겉과 속이 일치되도록 하고/

생각은 간사함을 경계해 잡됨이 없게 하고/ 감정은 방자함이 없이 경(敬)을 지키라/ 한낮에는 여러

사람의 눈을 경계하며/ 어둠 속에서는 자신을 돌이켜 보라.'

 

류중영 약력
   *1515년 군위 외가에서 출생, 1540년 4월 문과 급제, 5월 황주 훈도(訓導: 각 도의 군현에 배치하는

     종9품으로 주로 교육과 풍속교화 담당) 부임

   *1547년 6월 성균관 박사(博士: 정7품) 승진, 9월 이조판서 윤원형과 공무로 항론(抗論)해 파직,

     윤 9월 박사 복직

   *1568년 청주목사, 1573년 예조참의, 좌부승지

   *1584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추증, 1590년 영의정 추증


◆ 성실·올곧은 기개…일처리는 항상 공평무사
입암은 1540년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바로 벼슬길로 들어선다.

그는 직무가 아니면 권세가를 찾아가지 않았고, 사사롭게 공무를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어떤 일이든 누구보다 매끄럽고 빨리 처리했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굴종하는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맡든지 마음을 다했다.

1551년 10월에는 임시 병조좌랑(假兵曹佐郞)이 되어 군안(軍案: 병적)을 바로잡고 군무를 세밀하게

처리하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병조에서 오래 일한 아전들은 "일찍이 이같은 명관은 없었다"고 서로 말하면서, 임시 관리라고 혹 소홀히 대우하는 자가 있으면 "너희들이 종전의 관리처럼 대접해서는 안된다"고 질책하며 진심으로 복종했다.

1553년 9월에 사헌부 장령으로 부임했는데, 그 때 대사헌이 일을 너무 벌려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겁을 내 아무도 바른 말을 못했다. 그러나 입암은 끝까지 항변하고 논쟁했다.

서얼의 무과 허통(許通)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회의에서 대사헌과 격론을 벌이자, 후환을 염려한 동료가 입암의 팔꿈치를 뒤에서 잡아당기며 제지를 했으나 굽히지 않았다. 결국 대사헌이 뜻을 굽히고 입암의

뜻을 따랐으며, 뒤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천성이 하루도 한가로이 쉬지 못한다"
입암은 평소 자신의 마음만 믿었으며 남에게 아부할 줄 몰랐다. 일을 당하면 오직 가부만 가려서,

옳다고 생각되면 단행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방해도 개의치 않았다.

조정에 있을 때는 언제나 홀로 서있고 뒤를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 외직에 있었는데,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 무렵 퇴계 이황이 서울에 있었는데, 입암이 외임에 나가는 것을 애석해

하며 그림병풍 위에 '조정 안에는 사람이 남아돌아 발붙일 곳이 없으나, 시골에는 할 일이 많아 다시

관심을 두는구려'라는 시구를 써주었다. 

또한 그는 풍악을 즐기지 않는 성품이라서 공적인 연회석이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며 의관을 갖추어야 출입을 했다. 공무는 병으로 눕지 않는 한 쉬지 않았고, 여름에는 갈증이

심해 가족이 건강을 염려해도 듣지 않았다. 밤이면 손님이나 아들들과 고금의 경서와 역사, 그리고

백성의 고통과 풍속 등을 열심히 토론하고, 닭이 울 때가 되어 옆에 있는 사람은 잠이 와서 못 견디어도 그는 여전히 단정하고 엄숙하며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평생 아무리 고단한 일을 해도 앉아서 조는 일이 없었던 그는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나는 천성이 하루도 한가로이 쉬지 못한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철저한 인물이었다.


훌륭한 선생 있으면 자식들 보내 가르침 받아
자제들에게 의를 지키고 태도를 항상 단정하게 하는 등 도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치고,

항상 학업에 힘쓰도록 독려했다. "나도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중간에 벼슬길에 올라서

크게 성취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후회도 한다. 너희들은 앞날이 많으니 조석으로 깨우치고

조금이라도 나아가기 바라되, 다만 화려한 문장이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니다"

라고 훈계했다.

훌륭한 선생이나 덕망 있는 어른의 소문이 있으면 반드시 보내어 배우게 하고, 돌아오면 피로를 잊고

배운 것을 물어보고는 소득이 있으면 기뻐했다. 만약 분명하지 못하면 꾸중했다.

그리고 벼슬할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며, 지지 않으려고 다투거나 패거리를 짓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는 덕망 있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도 각별했다.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입암이 가도사(假都事: 임시 도사, 도사는 관리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 보는 종5품 벼슬)로

같이 있으면서 그 인품에 탄복하며 존경했다. 1552년 어사로 평안도에 갔을 때 회재가 강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더불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비록 평소에 알던 사람도

그 앞을 지나며 들르지 않았는데, 입암은 그곳에 가서 만나고 나왔다.

퇴계가 고향집에서 도학을 가르치자 입암은 그에 대해 '신명(神明) 같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자제들에게 이야기했다.

입암의 아들 류성룡은 행장에서 '곁에서 모신 지 30여년 동안 한 사람에게라도 감정이나 원한을 가지신 일을 보지 못했다'면서 여러 사례를 들었다. 그 중 하나. 입암이 황해감사로 있을 때 어느날 감영의 관리가 공무로 한양에 가서 대궐 앞에 이르러 여러 사람에게 큰 소리로 입암이 도정 처리를 잘못하고 있다고 하고, 또 터무니 없는 말을 꾸며 헐뜯고 돌아왔다. 자제가 그 소문을 듣고 진상을 힐문할 것을 청하니

웃으며 "내가 도정을 행하는데 사람들이 어찌 그 마음에 한두 가지의 불편함이 없겠느냐. 그래서 비방한 것으로 짐작되니 괘념할 바 없다"며 끝내 힐문하지 않았다.

입암은 또 가난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불쌍히 여기며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남의 장점이나 재능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애써 칭찬하고 착한 일을 보면 즐거워하고 선비를

좋아하기는 시종 변함이 없었으나, 억지로 함께 하려하지 않았으므로 아는 사람이 또한 적었다.

모든 일의 처리에 있어서 사리에 합당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되면 외부의 훼예(毁譽)나 이해에

구애됨이 없이 시행했고, 늘 이야기 하기를 "사람이 처세에 있어서 다소의 역경에 흔들려 그 일시의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반걸음도 내어 디딜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입암 불천위이야기
음복때 祭酒 먼저 나오고 밥·떡·과일·어물順
제수로 조기나 명태 아래에 미역놓는 게 특징

입암종가인 양진당(안동 하회마을)의 사당은 다른 종가와 달리 두 채의 건물로 되어 있다.

한 채에는 입암 불천위 신주와 종손의 4대조 신주가 함께 모셔져 있고, 다른 한 채에는 입암의 아들

겸암 류운룡의 불천위 신주가 봉안돼 있다.

한 종가에 두 위의 불천위가 있게 되면서 한 불천위를 별묘(別廟)에 봉안하게 되었는데,

다른 종가와 달리 아들인 겸암의 불천위를 별묘에 봉안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입암 불천위 제사(음력 7월13일)는 자시(子時)인 밤 1시에 진설을 하고, 1시30분에 제례를 시작한다.

3시쯤 음복 등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제사는 단설로 지내며, 요즘 입암 불천위 제사에 참석하는

제관은 60여명. 음복은 종손부터 제주(祭酒)를 한 잔 먼저 든 후 시작된다.

입암 17세 종손 류상붕씨(1951년생)는 음복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주가 따로 먼저

나오고, 이어서 밥(요즘은 비빔밥으로)과 떡, 과일, 어물 등 순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제주는 종부가 직접 담근 가양주를 사용하며, 가양주는 다른 첨가물 없이 찹쌀과 누룩, 솔잎이나 국화

등을 재료로 담근다. 맑은 것은 제주로 쓰고, 나머지는 막걸리로 만들어 사용한다.

제수로 미역을 쓰는 것(조기나 명태 밑에 놓음)이 특징이다.

6·25전쟁 때 16세 종손이 사당의 위패 13위를 묶어 등에 지고 피란했으나, 불천위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3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종택을 수리할 때 서애종가인 충효당서 양진당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신주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종손의 생각에 따라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겸암 류운룡의 불천위 제사는 음력 3월5일이다.

 

 

▼ 하회마을의 양진당(보물 제306호), 풍산류씨 입향조 류종혜 공이 하회마을에 들어와 처음 지은

집으로 입암고택(류중영의 호) 현판이 걸려있다. 이 곳에는 입암 류중영과 그 아들 겸암 류운룡의

불천위 신주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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