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구미시

금오산 채미정,삼강정려각

자즐보 2011. 7. 21. 19:33

 

 

 

금오산도립공원

 

 

 

금오산 전경...

 

 

금오산도립공원 표지석

 

 

금오지(金烏池)생태공원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

 

 

 

▼ 공원내 돌거북이

 

 

 

 

 

채미정 건립 당시 심은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채미정(採薇亭) 일원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채미정 일원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로 명승 제52호로 지정된 곳이다.

 

▼ 회고가(懷古歌)

고려의 옛 도읍지에 들러 인간 세상의 무상을 탄식한 회고의 시조로,

나라는 망하고 사람은 없어졌지만, 자연은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 하마비(下馬碑) 숙종33년 (1707)에 세워진 것...

타고 온 말을 묵어 두는 곳, 요즘은 말을 타고 오는 손님이 없어 늘 비어 있다.

 

▼ 채미정 정화기념비

1977년 11월 30일에 착공하여 1978년 완공 등 등 기록되어 있다. 

 

▼ 채미정(採薇亭)

 

흥기문(興起門) 

이 문에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롭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16개의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정방형의 건물로

 

한 가운데 한 칸의 방이 있으나
 사방이 들창으로 되어 있어 벽이 없는 방으로

들창만 들어 올리면 모두가 대청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다.

 

▼ 구인재(求仁齋)

 

▼ 경모각(敬墓閣)

 

▼ 숙종이 길재의 충절을 기린 어필오언구

 

 

 

야은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 길재선생 유허비각

 

▼ 고려문하주서 야은길선생유허비

숙종 30년(1694)에 선산도호부사 김만증이 세운 것이다.

 

 

야은 길재 묘  

 

경북 구미시 오태1동 

용머리산의 끝 부분에 있는 마을 뒤편에 있다.

 

 

 

선산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 난 충신,효자,열녀의

세 분을 기려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나라에서 표창한 징표로...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 정려비

 정조19(1795)년에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효자 배숙기의 정려비

효자 배숙기는 1470년 성종 원년에 진사시와 문과를 거쳐

홍문관 저작(著作) 벼슬을 하였다.

부모님 섬기기를 극진히 하여 외출했다 늦게 돌아오면 부모님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안인사를 하고 항시 언행을 조심하여

부모님께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현재 비는 없고 "효자 홍문저작 배숙기지려"라는 현판만 걸려 있다.

 

열녀 약가 정려비

열녀 약가는 길재 선생과 같은 시대인 고려말에 역시 봉한리에서 태어났다.

조을생이란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화목하게 살았다.

그때 왜구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선산까지 올라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만행을 저지를 때

남편 조을생이 군인으로 자원하여 싸우다 왜구에게 잡혀갔다.

 

약가는 그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의복을 벗지 않고 오직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였다. 부모는 조을생이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재혼을 독촉하였으나 듣지 않고 8년 동안 수절하였다.

 

어느 날 남편 조을생이 돌아왔으나 어두운 밤이라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

약가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가 이튿날 아침에 드디어 남편과 다시 만났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목숨을 버리지 않고 행복하게 끝을 맺었으면서도

정려를 받은 드문 사례로 이로 인해 팔년고등(八年孤燈)이란 고사(古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