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문소루(聞韶樓)
의성은 원래 문소(聞韶)로 불려오다가 고려 태조12년(서기929)
후백제 견훤이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이곳 의성부를 공격해 왔을 때,
이를 맞아 힘껏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김홍술(金洪術)공의
충절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태조는 "의(義)로운 성(城)" 곧 의성(義城)이라
명명(命名)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의성의 중심지인 의성읍은 구봉산 9봉이 휘돌아 감아 남대천 육곡수가 흐른다. 구봉산은 원래 구성산(九城山)이라 불러오다가 일제 때 마을 명칭 변경이 있을 때
구봉산(九峰山)이라 하였으며 해발 211m로 예부터 읍성을 방어하는
요새(要塞)로 알려져 왔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는 봉우리가 하나뿐인 기다란 산이었는데
남대천에서 어느 절세미인인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을 때 냇물 가운 데 비친
산봉우리가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기어 가는걸 보고 "에구머니"하고 소리치면서
바라보니 웬일인지 꿈틀 거리던 봉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뱀의 움직이는 등과 같이
봉우리가 아홉개(九峰)생겼다고 전해 오고 있으니, 이 산이 바로 성을 진호하는
영맥으로 제9봉에는'문소루'라는 누각이 푸른 하늘아래 날개를 펴고 의구히 서 있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밀양 영남루(嶺南樓), 안동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즉 영남지방의 사대루로 불렀던 누각으로
교남사대루 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고 한다.
문소루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고
여기에 김지대의 시(詩)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김(金)학사 지대(之岱)가
일찍이 경상도 안찰사로 있을 때 문소루에 대해 읊기를...
"문소의 공관 깊숙한 후원에는/백척높은 누각이 서서 있구나/
십리의 향기바람 주렴은 걷혔는데/달 아래 피리소리 아련하게 들리더라/
연기서린 버들가지 가늘게 이어 있고/비갠 뒤 산빛을 프른 빛 듣는 돗다/
오랑케 무찌르려 달리던 무인이라/안찰사로 와서보니 조심되기 그지없다"
라는 시(詩)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동사일기에 1711년 5월 26일 연회를 배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리들의 향연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27년에는 관청의 회의실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소루는 6.25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는데 당시에 고려시대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金子粹), 포은 정몽주(鄭夢周,1339-1392) 가 남긴 시판과
문소루 중건기문 등도 함께 불탔다 한다.
그 후 1983년 9월 옛 모습을 되살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문루로 복원되었다.
원래의 터는 읍내 객사의 북쪽, 의성관아 뒤편 자리였으나,
현재의 문소루는 구봉산 제9봉에 복원되어 이 고을을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떠나 보내고 있다.
문소루 표지석
구봉산 제9봉에 복원되어 있는 문소루(聞韶樓)
문소루 현판
소소구성봉황래의(簫韶九成鳳凰來儀)
경서의 우서(虞書)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구절로
순임금때 음악을 9번 연주하니 봉황이 찾아와 논다는 뜻이다.
포은 정몽주가 고향 영천에서 마지막 상경 길에 자신에 운명과
고려조의 앞을 내다보며 읊은 시문<왼쪽>과 김지대가 경상도 안찰사로서 지방을
순시하던 중에 읊은 시문<오른쪽> 편액.
문소루 중건기념비
문소루에서 본 의성읍 전경,,,
첨성재(瞻省齋)
提學 金得河(재학 김득하)를 제향하는 곳이다.
자(字)는 문경(文卿), 호(號)는 첨성(瞻省),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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