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의성군

세천정, 우곡서원

자즐보 2011. 4. 11. 00:11

 

 

 

세천정 & 우곡서원

 

오국화(吳國華),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금산(錦山).

 

예의전서(禮儀典書)와 경상도안렴사 등을 역임하였다.

보은 정몽주가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고려의 국운과 함께

선죽교에서 천추만대에 빛나는 절의를 보여주었다면  

금산 오국화 역시 숭고한 효절을 남긴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노사기정진(蘆沙寄正鎭)이 쓴 "순양서원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評議◇吳國華按事嶠南 聞先生死節三    

日痛哭◇理于地慇居山中    

終身不關而我朝屢徵不出,每聞徵命則臨水  

洗耳後人號基水洗耳川云……』

  

여기에서 금산의 지조를 잘 엿볼 수 있는데 간단히 해석하자면

"오국화가 암련사의 의무를 띄고 영남지방에 가던 중 정몽주(鄭夢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삼일간 통곡하다가 차고 있던 인(印)을 땅에 파묻고

문소(聞韶)의 금산(錦山)에 숨어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성계가 건국한 뒤 그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몇 번이나 불렀으나,

그때마다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하여 냇물에 나가서 귀를 씻었고

후일 후인들이 이 냇물을 세이천(洗耳川)이라 하였다. "라는 뜻이다.  

유림에서는 그의 충절을 추모하여 묘 아래 단을 만들어 단향(壇享)하였다.

저서로는"금산실기"가 있다. 의성읍 우곡서원에 배향.

 

 

세천정(洗川亭)

 

 

 

 

 

 

고려징사금산오선생유허비각

 

 

 

 

 우곡서원(愚谷書院)

 

 

 

돈륜문(敦倫門)

 

 

 

우곡서당(愚谷書堂)

 

 

 

동재인 순화재(醇化齋)

 

 

 

 서재인 영모재(永慕齋)

 

 

 

 

숭절사(崇節祠)

 

 

 

고려징사금산오선생신도비

高麗徵士錦山吳先生神道碑

 


 

 

  건축 배경

 

우곡서원은 1983년 3월 우곡단(愚谷壇)에서 격상되었으며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고결한 선비로 종신불출한 오국화의 의절을 기려 1918년 유림에서 우곡에 축단하고 봉향하여 왔던 곳이다. 그 옆에 신도비각, 묘우 등이 건립되었다.


 건축 특징

우곡서원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강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강당의 전면에는 동.서재를 두었으며 좌측에는 방형의 토석담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인 숭절사가 자리 잡고 있다.

오국화신도비는 우곡서원 내 숭절사 좌측에 있다. 비석은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사각형의 옥개형 지붕이 있는 형태이다. 전면에 고려징사금산오선생신도비 라고 제액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 기미 구월립 건비연대가 각자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비신 폭 56㎝, 높이 174㎝, 두께는 39㎝이다.

 건축 구성

돈륜문(敦倫門)이라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우곡서원이라 편액한 강당이 있으며, 뒤로는 토석담을 둘렀다. 강당 앞에는 양쪽으로 동.서재를 두었는데, 동재인 순화재(醇化齋), 서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강당의 좌측에는 동쪽으로 나 있는 경절문(景節門)을 들어서면 방형의 토석담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숭절사(崇節祠)가 자리 잡고 있다. 숭절사의 좌측이며, 우곡서원 내의 가장 서편에는 ‘고려징사금산오선생신도비(高麗徵士錦山吳先生神道碑)’라고 비명이 새겨진 오국화신도비가 세워져있다.

 

 

 관련인물

- 오국화의 생애와 가족

본관은 해주(海州)로 그의 선조는 중국에서 와서 수양군(首陽君)에 봉해졌고,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보계(譜系)가 실전(失傳)되어 공이 역임한 벼슬, 치적(治積), 생몰년월일 등을 아울러 상고할 수 없다. 공이 의성에서 은둔하고 생을 마쳤기 때문에 자손들이 의성인이 되어 흩어져 거주하고 있으며, 모두 공을 조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식이 셋 있는데, 이름은 책(策), 순(淳), 진(進)이다. 책에게는 자식이 없으며, 순은 자식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종신(宗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찰(札)과 변(變)이다. 찰은 생원에 합격하였다.

종신은 자식 둘을 두었는데, 세인(世仁)과 처인(處仁)이다. 세인은 참봉에 이르렀으며, 처인(處仁)은 승지에 이르렀고, 찰(札)은 삼남을 두었다.
선생이 은거한 우곡(愚谷)의 묘소 앞에 1918년에 사림의 공의에 의거하여 단소(壇所)를 만들어 봉향(奉享)하였고, 지금의 세천정 뒤에 고려징사금산오선생유허비(高麗徵士錦山吳先生遺墟碑)를 세워 선생의 절의를 기렸다. 그 후 1983년 3월에 우곡단(愚谷壇)에서 서원으로 격상되었다.
금산선조실기중간발(錦山先祖實記重刊跋)에는 「공이 평생토록 지은 책은 “시렁에 넘치고 용마루를 채우며 책이 담긴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이 날 정도로 많았으나 여러 차례의 병선(兵?)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수지잔묵(數紙殘墨)만이 전해진다.”」라고 하였고, 일실된 원고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금산선생실기(錦山先生實記)인데, 오늘날에는 이본(異本) 2권만이 전해질 뿐이니, 각각

을해년(1935)에 간행된 금산선생실기 1,2권과 금산실기(錦山實記)이며 무오년(1918)에 중간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 고려(高麗)의 대부 금산(錦山) 오국화(吳國華)

고려의 대부 금산 오국화는 떳떳함을 지켜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와 절개를 지켜 통곡하면서 관인(官印)을 땅에 묻은 지가 501년된 1892년(고종 29)에 재루(齋樓)가 지어졌고, 27년 뒤 1918년에 단(壇)이 이루어져 비로소 이곳에서 향사를 지냈다.

단 위에는 오국화의 묘소가 있고, 오른편에는 신도비가 있다.

다음은 서원 내에 있는 유시비(遺詩碑)에 있는 내용인데, 오국화의 시로 전한다.

-오언일구(五言一句)
“맑은 바람은 전원생활을 즐기던 도연명을 생각하게 하고
가을의 황국화는 백이숙제의 높은 절개를 그리워하게 하는구나”

-칠언일수(七言一首)
“나무는 붉은 빛을 먹은 듯하건마는
나의 일편단심은 날로 허송함이 애석하도다

세상에 깊은 정을 풀기에는 술독에 술이 있고
내 마음 속에 지닌 상념은 도덕의 글이 끼쳐있네

하늘은 지기를 연하여서 시냇물 소리가 불어나고
산은 구름머리에 둘러 안겨 그림자만 남았도다

맑은 바람이 유별한 곳 없다고 이르지 말라
시절이 이러하니 숨어살기를 즐기노라”

 마을이야기(의성읍 업리)

- 업(業)을 얻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업골[業谷]

의성읍 업리(業里)는 동쪽은 점곡면(點谷面), 북서쪽으로는 단촌면(丹村面)을 경계하며 남쪽으로는 철파리(鐵坡里)가 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후 달성배씨(達城裵氏)가 들어와 살았는데, 뒷 산에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 가서 치성을

드리면 업(業)을 얻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업골[業谷] 또는 용암동(龍岩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업 1리는 읍소재지로부터 북편 약 4km정도 떨어진 구안 국도에 인접한 이 마을은 고추를 비롯한 특수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이 마을에 우곡서원이 있는데, 철로 건너 단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기슭 구안 대로변에 위치한 이 서원은 1983년 3월 우곡단에서 격상되었다. 우곡단 옆에 우곡서당(愚谷書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건립 되었는데, 안렴사(安廉使)를 지낸 오국화가 스승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격살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사흘 동안 통곡하고 품에 간직한 안렴사 인을 땅에 묻고 이웃 단촌면 어봉산에 은거하였다.

업 2리는 읍소재지로부터 북으로 액 4km 떨어져 산골짜기로 쑥 들어간 자리에 위치하여 의성김씨가 주를 이루면서 살고 있다.

마을 뒤편 산등성이를 경계로 단촌면 상화리와 접하고 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이 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 산등성이에는

살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하여 지금까지도 이 동네를 행촌리(杏村里)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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