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문화행사·축제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실경뮤지컬 "락"

자즐보 2011. 7. 17. 21:47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2010년 경술국치 100년, 향산 이만도 선생

자정순국 100주년을 추모하는 국악뮤지컬이다.

 

 

안동댐 민속촌 "동산서원" (2011년 7월 16일, 밤8시)

 

 

밤이 깊어 가는 시각

동산서원을 찾은 관람객들...

 

 

 

 

뮤지컬 "락"의 주 스토리는

향산 이만도 선생(퇴계 이황의 11대 손)과 며느리 김 락(의성 김씨)의

일제에 맞선 나라사랑에 대한 의미를 그린 山水實景 뮤지컬이다.

 

 

 

향산(響山) 이만도(1842~1910)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아버지는 대사성 휘준(彙濬)이며, 휘철(彙澈)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홍문관부수찬·장령·지평·병조정랑·교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했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했다.
다시 복직되어 사성·응교·장악정등을 지낸 후, 그해 가을 양산군수가 되었다.
이때 흉년을 당하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관찰사의 가렴주구에 항의하여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수임했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이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栢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경학을 연구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관군에게 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해 8월 한일합방이 단행되자 유서를 쓰고 단식에 들어가 
24일만에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 국왕에게 죄인임을 청하며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나서는 향산선생...
 
 
만류하는 며느리(김 락)에게
너희들은 살아서 만국에 알리거라. 조선은 독립국임을,,,
 
 
소식을 접하고 달려 온 딸이 아버지의 단식을 만류하지만...
 
 
향산 이만도는 단식으로 일제의 강제합방에 항거한다.
이에 일제는 향산 선생의 단식으로 죽음이 될 경우 전국에 퍼질
막대한 영향력을 우려해 주제소에서 주의 관찰을 한다.
 
 
 
일제의 온갖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단식 24일만에
향산선생은 국왕에게 마지막을 고하며..
 
 
온 국민에게 일제에 맞설 용기를 불어 넣으며 생을 마감한다.
 
 
 
 
 
김 락(향산 이만도의 며느리)
100년 전, 시아버지, 남편, 아들, 사위, 큰 형부, 큰 오빠와 친인척의 대소 일가가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했다. 본인 역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도
10여 년간 대한의 독립을 그리다 돌아가신 분이 바로 김 락(金 洛)이다.
 
 
김 락 여사의 친정인 안동 내앞(川前) 의성 김씨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재산 천 석' 이라 불릴만큼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김락은 향산 이만도 의 아들 이중업과 결혼을 하면서 고난도 시작 된다.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퇴계선생의 11대 손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현 서울대 총장 격)을,
향산은 동부승지(현 청와대 수석비서관 격)를 지냈다.
 
 
3대에 걸친 급제와 벼슬은 가문의 대 영광이었으나 나라가 위급해지자 과감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한다.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장을 맡아
투쟁을 하고 여의치 않자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 69세였다.
 
 
향산이 서거하자, 증손자를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태어나게 할 수 없다며
만삭의 임신부였던 손자며느리와 일가를 이끌고 엄동설한에 만주로 이주한 사람이
백하 김대락이다. 곧 김 락의 친정 큰 오빠다. 그런 김대락과 만주로 가서 이시영 형제들과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고 상해 임정의 초대 국무령(현 대통령 급)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김 락의 큰 형부다.
 
 
김 락의 남편인 이중업(起巖 李中業·1863~1921)은 이미 아버지 향산 이만도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 광복 활동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3·1운동 시에는 김창숙과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했으니 부인 김락의 목숨건 협력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 락의 아들 이동흠(李棟欽·1889~1967)과 이종흠(李棕欽·1901~1975)은
군자금모금 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한다.
 
 
김 락의 맏사위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종손인 김용환은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자처했고, 둘째 사위 유동저 역시 당당한 독립운동가였다.
김 락 본인 또한 1919년 58세의 몸으로 예안 3· 1 만세 운동에 참여,
결국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평생 두 눈을 잃게 되고
10여 년간 고문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1929년 생을 마감하였다.
2001년 8월 15일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시아버지의 단식 죽음후 유명을 받들어
일제와 맞서 예안, 안동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김 락 여사
 
 
 
일본 경찰에 잡혀 갖은 고문 끝에 두눈을 인두로 지지는 참극을 당하는 장면...
 
 
 
내 눈은 보이지 않지만 너희들 일본이 패망하는
그 날은 나에게 보인다며 절규하는 김 락...
 
 
 
그녀의 말처럼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는 감격의 그 날이 왔다...
 
 
뮤지컬 "락" 출연자들의 인사...
 
 
 
 
 
 
 
향산 이만도, 그 며느리 김 락, 지아비 이중업과 그 아들들
3대에 걸친 일제 투쟁과 독립운동을 그린 뮤지컬 "락"
"락"은 김 락 여사의 이름을 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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