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아버지는 대사성 휘준(彙濬)이며, 휘철(彙澈)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홍문관부수찬·장령·지평·병조정랑·교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했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했다.
다시 복직되어 사성·응교·장악정등을 지낸 후, 그해 가을 양산군수가 되었다.
이때 흉년을 당하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관찰사의 가렴주구에 항의하여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수임했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이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栢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경학을 연구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관군에게 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해 8월 한일합방이 단행되자 유서를 쓰고 단식에 들어가
24일만에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 국왕에게 죄인임을 청하며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나서는 향산선생...
만류하는 며느리(김 락)에게
너희들은 살아서 만국에 알리거라. 조선은 독립국임을,,,
소식을 접하고 달려 온 딸이 아버지의 단식을 만류하지만...
향산 이만도는 단식으로 일제의 강제합방에 항거한다.
이에 일제는 향산 선생의 단식으로 죽음이 될 경우 전국에 퍼질
막대한 영향력을 우려해 주제소에서 주의 관찰을 한다.
일제의 온갖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단식 24일만에
향산선생은 국왕에게 마지막을 고하며..
온 국민에게 일제에 맞설 용기를 불어 넣으며 생을 마감한다.
김 락(향산 이만도의 며느리)
100년 전, 시아버지, 남편, 아들, 사위, 큰 형부, 큰 오빠와 친인척의 대소 일가가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했다. 본인 역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도
10여 년간 대한의 독립을 그리다 돌아가신 분이 바로 김 락(金 洛)이다.
김 락 여사의 친정인 안동 내앞(川前) 의성 김씨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재산 천 석' 이라 불릴만큼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김락은 향산 이만도 의 아들 이중업과 결혼을 하면서 고난도 시작 된다.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퇴계선생의 11대 손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현 서울대 총장 격)을,
향산은 동부승지(현 청와대 수석비서관 격)를 지냈다.
3대에 걸친 급제와 벼슬은 가문의 대 영광이었으나 나라가 위급해지자 과감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한다.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장을 맡아
투쟁을 하고 여의치 않자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 69세였다.
향산이 서거하자, 증손자를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태어나게 할 수 없다며
만삭의 임신부였던 손자며느리와 일가를 이끌고 엄동설한에 만주로 이주한 사람이
백하 김대락이다. 곧 김 락의 친정 큰 오빠다. 그런 김대락과 만주로 가서 이시영 형제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