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대구 달성군

대구 신숭겸장군 유적지

자즐보 2010. 12. 7. 17:59

 

 

 

 

 

   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 유적지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장군 상

 

대구시 동구 봉무동

팔공산 자락의 파군재 삼거리,,,

 

천팔십여 년 전 이 곳에서는,,,

견훤의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치열한 결전을 벌였다.

왕건을 피신시키고 신숭겸 장군이 왕으로 변장하여 군사를 이끌고

견훤군과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 고려군이 파하여 흩어진 곳이라 하여

"파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장절공 신숭겸 장군은,,,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위풍당당히 이 곳을 지키고 있다. 

 

 

 

 

충렬도(忠烈圖)

파군재 전투에서 독전하는 장군의 모습,,,

 

 

사안도(射雁圖)

신숭겸 장군이 평산에 사냥가서 기러기에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신숭겸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제1호)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은 태봉의 기장으로 있으면서 배현경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았다.

동시에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에서 싸웠으나 크게 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과 함께 견훤군과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다.

이를 틈타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무()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함께 폐사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를 새로 지어 지켜오고 있다.

 

 

유적지를 지키는 해태상

뒤에 보이는 산은 태조 왕건이 무사히 피신하여 "왕산"이라고 한다.

 

 

유적지 전경,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홍살문

 

 

표충단 서문

 

 

표충단(表忠壇)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곳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과

후손 신흠이 1607년 단(壇)을 쌓아 충절을 추모,,,  

 

 

 

 순절지지비각(殉節之地碑閣)

이 비는 1819년(순조 19) 신숭겸의 28대손 신의직(申義直)이 대구 영장(營將)으로

부임했을 때 단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 또한 1856년(철종7) 순절비 보호각을 창건

하였으며,  1928년 중수하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보수를 하였다.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비(高麗壯節申公殉節之地碑)

 

 

신숭겸장군 나무, 약 400년된 배롱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연화대(蓮花臺)

표충단 내경에 위치한  연화로 조각된 하대 위에 등화석 모양의 구조물,  

고려시대 불교의식으로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힌것...

 

 

 

 

표충단소 삼문

 

 

 

충렬문(忠烈門)

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여 건립된 "상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서쪽에서 본 상절당(尙節堂)

 

상절당(尙節堂)

 

 상절당:문중회의 장소,강당         

                  

 상절당 내부에 걸려 있는 춘천 서면 방봉리의 장군 묘역 사진

                    

    상절당 상량문

        단기 4325년2월20일(서기1992년)[장군순절후1066년]에 상량            

                 

            

 상절당 우측에 서 있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

 

 

표충재 삼문

이 안에는 향사를 지내는 "표충재"와

그 뒤 쪽에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표충사"가 있다. 

 

 

 

표충재(表忠齋)

매년 한식 때 향사를 지내는 곳으로, 재사와 동재, 서재가 있다.

 

 

1607년(선조40)에 폐허가 된 지묘사 자리에 장절공 사우를 세우고,

1670년 충렬사로 중창,  1672년(현종13)에 표충사로 사액(賜額)받았으나

1871년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훼철, 1888년 표충재를  창건하였다.       

                                   

             

표충재 대청에 걸려 있는 고려 睿宗(예종,1120년)의 주련   

 "忠義明千古"충의명천고(충의가 천고에 밝게 뚜렸하다 )        

           

                    

           "死生唯一時"사생유일시(죽음과 사는 것은 오직 한 때이네)           

                                                        

 

동재(東齋), 세칸의 방으로 구성(1888년 건립)

 

 

서재(西齋), 가운데 방2칸, 양쪽에 제기고(祭器庫)와 부엌이 있다.

 

 

동편에서 본 표충재(表忠齋) 

 

 

 

표충사(表忠祠)

왕산 아래 제일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표충사는

선조40년(1607)에 장군의 외후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 공이

옛 지묘사 터에 건립하였다. 그 후 사우가 퇴락하여 헌종11년(1670)에

건물을 다시 짓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헌종13년(1672)에

表忠祠라 사액되었다. 숙종2년(1676)에 신숭겸과 함께 순절한

김락 장군을 배향하였으나, 고종8년((1871)에 훼철되어

1988년 후손들이 중건하고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셨다.

표충사로 들어 가는 문은 "경의문"이다.

 

표충사는 신숭겸 장군의 향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988년 신축

         내부엔 장군의 영정,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정(영정과 위패는 1993년에 봉안)

         신숭겸장군의 영정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다.           

 

영정을 모신 사당 내부

             

                    表忠祠 경의문                 

 

                                       

 표충사 뒷언덕에 있는 "매판단" 표충사 현판을 묻은 곳이다.

 

  

      

상절당, 표충재와 표충사 전경

 

 

충렬비

표충재 동쪽에 있는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 3월에 잘절공의 외후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이곳 유지를 살펴보고 크게 느끼는 바 있어 영남에 사는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묘사 옛 터에 사우를 창건하고 충렬비를 세웠다.

 

비명은 예조판서 문정공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정조5년(1781년)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것을

관민이 힘을 모아 바로 세우고  비각도 개건(改建) 하였다.

고종9년(1872년) 후손들이 비각(碑閣)을 중수하였다.

 

보통 비를 밭치고 있는 거북이의 표정은 근엄하지만

이 비의 거북이는 귀엽게 웃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내 신숭겸장군 동상

말을 타고 날아 가는 기러기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사안도의 모습 

 

 

태조 왕건 나무, 약 400년 된 팽나무 

 

 

 

 

유적지 관리소

 

 

유적지 전경

                 

                 

                 신숭겸 장군의 생애

             이름은 능산(能山), 휘(諱)는 숭겸이요, 시효는 장절공이다.

               공의 선대는 전라도 곡성 사람으로 , 뒤에 평산으로 관향을 받았다.

               태어나면서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18년 6월에 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

               복지겸등과 모의하여 궁예왕의 포악성에 반기를 들어 궁예를 폐위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하였다.

                

                927년(태조10년)에 견훤 군사가 신라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은후,노략질과 갖은 만행을

                저질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평소 동맹관계인 신라를 돕고자 왕건은

고려군 5,000기병을 이끌고 공산의 동수(桐藪)에서 기다렸다.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의 경애왕을 도륙하고 평정한후 사기 충천하여 회군하는 견훤군을

               만난 고려군사들은 노독과 장기간 강행군으로 지쳐, 매복된 견훤군사에 포위되어

               전멸지경에 이르자, 신숭겸장군은 왕건을 피신시키고 대신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 부장과 함께  독전하다가 지금의 파군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한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후백제군에게 어의와

               두상마저도 탈취당한 상태에서 유금필 장군이 알고 있는 신장군의 왼쪽 발바닥에 북두칠성과

               같은 사마귀의 무늬가  있음을 보고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단소에 임시로 안장한후   

               왕건의 능지(陵地)로 지정해둔 춘천 서면 방동리 산 816-1에 매장했다.

              

                전사했던 장소에 원찰(願刹)을 창건하여 지묘사(智妙寺)라 하였고 공의 아우인

               능길(能吉)과 아들인 보장(甫藏)을 원윤(元尹:고려 벼슬 이름)으로 삼아

공의 공훈에 보답했다..

 

 

 독좌암

동수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홀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바위

 

 

 모영재(慕影齋)대구시 동구 평광동(실왕리) 108

이곳은 장절공의 영정각이 있던 곳이다. 장절공의 영정은 본래 지묘사에

봉안되었었는데 지묘사가 헐린 뒤에 대비사(大悲寺)로 옮겨져 봉안되었다가

순조19년(1819년) 대구부리 김철득의 투장흉계(偸葬凶計)로 절과 함께 영정도 불타 버렸다.

 

그 후 순조 28년(1828년) 지묘동의 선비 최심의 고변으로 자손들이 이를 알고

관가에 연달아 송사를 한 결과 투장한 무덤 셋을 관가에서 파내고 1832년에

그 자리에 후손들이 영각 유허비를 세웠다. 

재실은 1930년 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대비사 사지에 세운  것인데 

매년 음력 9月 9日에는  신씨문중(申氏門中)에서 享祠(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1966년에 또 한차례 중수(重修)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모영재(慕影齋)는 

영각(影閣)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지비

(高麗太師壯節申公 影閣遺墟之碑)

평광동 옛 대비사터에 전사한 신숭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재실 바로 곁에 있는 高麗太師壯節公 申公影閣遺墟碑(고려태사장절공

신공영각유허비)는 원래의 것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1832년 후손인 承政院(승정원)

都承旨(도승지) 申緯(신정위)가 새로 세워 비문을 찬(撰)했으며

1848년(憲宗, 헌종 14)에 유림에서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아래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대구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