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대구 달성군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자즐보 2012. 5. 28. 20:10

 

 

 

도동서원(道東書院/사적 제488호)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에 있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64년 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최초로 쌍계서원(雙溪書院)을 세웠고,

선조6년(1573) 임금님이 서원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가

1607년 선조대왕 40년에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라

이름지어 사액서원이 되었고,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고종2년(186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철폐하지 않는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서원 전경

 

 

김굉필 나무, 보호수인 은행나무 405년생...

 

 

도동서원 사적비

 

 

수월루(水月樓)

서원을 들어서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의 넓은 들판이 보이는 정자가 있어

공부하던 유생들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는 물위에 비친 달빛으로 읽는 수월루이다.

 

 

환주문(喚主門)

환주문은 부를 환(喚) 주인 주(主)로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다.

갓쓴 선비들은 고개를 숙여 들어오도록 처음부터 문을 낮게 지었고, 배움의 문으로 들어서는 선비는

스스로 마음가짐을 낮추고 들어 오라는 뜻이다.문과 연결되어 있는 토담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도동서원 강당인 중정당(보물 제350호)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중정당의 기단

중정당의 기단은 우리 선조의 정성과 기술이 가득 들어있다. 기단은 가파른 산비탈에

튼튼한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보통 성인의 키만큼 앞면을 높이 쌓아올렸다. 돌은 거의 같은 모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6각형 내지 12각형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모든 정성을 기울여 끼어 넣었다.

크기와 색깔을 더하거나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섞여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높은 기단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이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고 있다.

눈을 둥글게 뜨고 있어 위엄을 보이기보다는, 가까이 다가서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용(龍)은 물을 다스리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용두석은 홍수로 강이 넘치는 수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들어있다.

그리고 좌우로 생기가 넘치는 작은 호랑이(細虎)가, 동쪽은 해(日)와 함께 서쪽은 달(月)과

함께 오르고 내리는 모습을 재미있게 새겨두었다. 주역에서 해는 양(陽)을 나타내고, 달은 음(陰)을 뜻한다.

바로 음양(陰陽)을 조화를 상징하는 중정(中正), 중용(中庸)을 뜻하고 있다.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인 도동서원 현판

 

 

이 강당은 도동서원의 중정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도동서원 현판은 선조대왕의 친필이다.

 

중정(中正)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염계 주돈이선생이 지은

태극도설에서 나오고 있다. 성인은 알맞음과 바름과 인의로써

모든 일을 정하였고, 고요함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의 기준을 세웠다.
    (聖人定以中正仁義, 而主靜, 立人極焉.)

 

    중정(中正)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바로 중용(中庸)을 나타낸다. 중정당 현판 밑의 창호를 열어보면,

계단이 한 가운데를 꿰뚫고 달리고 있다. 중정당에 앉아 바라보는

건너편 산과  들의 경치는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들어온다.  

 

 

강당에서 본 환주문과 수월루

 

 

동재, 군의재(君義齋)

 

 

서재, 군인재(君仁齋)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제사지내는 공간인 사당(보물 제350호)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으며, 

서원에서 가장 높이 자리잡고, 엄숙한 분위기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사당 내부에는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문목공 한강 정구선생의 위패를 동향으로 배향되고 있다.

            
                                         

서원관리인이 살던 전사청

 

 

유물전시관

 

 

대니산 다람재에서 본 전경

 

 

 

김굉필(1454~1504년)은 서흥 김문(金門)으로, 호(號)를 한훤당(寒暄堂)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선생은 단종 때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하셨고, 연산군 10년 51세의 나이로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선생은 당시 함양군수로 계셨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인으로 소학을 생활의 모범으로 즐겨 배우고 익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렀다. 소학은 어린이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예절과 수양에 관한 내용을 적은 유학 기본서이다. 선생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지만,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戊午),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평안도와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썼고, 영남 사림의 도학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도학을 전하여 조선에서 도학이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다. 모재 김안국, 사재 김정국 형제와 금헌 이장곤 및 신당 정붕 등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들도 선생의 문인들로서, 중종 때 실행하였던 왕도정치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한훤당은 우의정으로 추증받았고,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과 더불어 조선 5현의 수현(首賢)으로서, 조선의 선비로서는 최초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형장에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았으니 칼날에 다치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임하는 선비의 엄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죽음 앞에서도 수염하나까지 부모를 생각하는 효(孝)의 실천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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