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파천면의 중평은 평산신씨의 집성촌으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청송~진보를 잇는 31번 국도에서 중평리마을 입구
마을 초입에는 중평리 솔밭이 보기 좋게 우거져 있으며,
이 솔밭 앞으로는 사천의 물가라 이름하여 사양서원이라 정한
바로 사수(泗水)인 낙동강의 지류 용전천이 흐르고 있다.
중평리마을회관 앞 안내간판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
이 집은 18세기 초반에 지은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종가이다.
신숭겸 장군의 15대손인 신득청 선생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조선 전기 이후 진보면 합강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후 종가를 비롯한 일족들이 중평으로 옮겨와 지금의 종택을 세웠다.
불훤재 종택이라고도 불리는데 구조상으로는
조선시대 사대부가를 대표하는 주택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솟을대문 옆에 좌우 행랑과 곡간을 두고 있고 넓은 안마당에
ㅁ자형의 안채·별실·정자·사당·영정각을 갖추고 있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은 청송 파천면 중평리의
사남고택과 서벽고택을 아우르는 동종파의 중심이 되는
종택이라 할 수 있다. 접근하는 동안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의
규모로 상당한 품격과 의미를 갖춘 집일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2칸의 행랑채가 있다.
솟을대문 사이로 별동의 새사랑채가 보인다.
안채 앞 사랑마당에 별동의 사랑채가 위치해 있는데
높은 기단을 두고 정면 5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우측에 넓은 대청을 두고 있다.
대문을 들어 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두고
정면 7칸, 양측면 5칸, 후면 5칸 '口'자형의 안채가 당당히 서있다.
정면 7칸 중 가운데 칸에 중문을 두었고 우측에 사랑방과 마루방으로
사랑채를 설치하였으며 사랑방 뒤쪽으로 중방을 두어
안마당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종부께서 방겨주시며 이것저것 알려주신다^*^
할머니께서 아궁이에 굼불을 지펴 안채에 연기가 서려있다.
멀리 있는 자식들이 초등동창회에 내려와서
오늘밤 묵고 갈거라며 웃음을 지으신다^*^
안채 뒤쪽에 배치된 사당이란다...
영정각 & 서원,,,
연로하신 종부께서 이곳까지 손쓰기엔 무리이겠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 종부 이성숙 여사 |
평산신씨의 시조는 몇 해 전 ‘태조 왕건’이란 드라마에서 충(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강골무인의 기상을 잘 보여준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삼중대광 태사에 오른 신숭겸(申崇謙)이다. 그의 초명은 능산으로 광해주(춘천지방) 출신인데 태봉(궁예가 세운 나라)의 기장으로 있다가 918년 배현경,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던 인물이다.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신숭겸 장군의 12세손인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의 손자인 판사공(判事公) 신득청(申得淸: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인 신득청은 영해 인량촌에 주거하던 중 일어난 신임지화(辛任之禍)로 인해 자손 양 대가 안동과 원주 등지로 은둔하다가 증손인 지(祉)가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로 이거해 살게 된다. 그 후 예남의 현손인 한태(漢泰)가 파천면 중평리로 이거해 조선 숙종 때 종택을 짓고 집성촌 150여호를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성 이후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으로 알려진 평산과 고령신씨는 전체 신씨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이 두 본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종택에는 영양 석보 재령이씨 집안에서 22세에 시집와 90세인 지금껏 70여년을 판사공파종택 종부로 살아 오고 있는 이성숙 여사가 큰 종택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고 종부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이제 내가 죽으면 누가 이 집에서 살는지..."라며 속내를 비친다.
종부의 삶이 어디 우아하고 고상하며 편한 것이랴,,,
남편 내조에 시댁식구 모시며 한 달에 한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고단한 삶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지 않은가. 마을에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서벽고택, 사남고택이 나란히 자리하며 집성촌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마을 동편 산기슭에 사양서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앞은 낙동강 지류인 용전천이 흘러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나는 길손이 쉬어 갈만하다 여겨진다.
선조들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계 중 대표적인 것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한 학문에만 힘쓰지 말 것이며, 신의를 저버리고 교사(巧詐)하게 남을 사귀지 말 것이며, 자기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단점만을 책하지 말라’는 등 청백(淸白)을 위주로 한 교훈을 남겼다.
파는 다르지만 같은 평산신씨의 후손으로
종부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말씀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