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서원의 유래
호계서원의 연혁에 대하여 영가지는 이렇게 적었다.
<여강서원> 안동부의 동쪽 여산촌(廬山村)에 있는데 곧 백련사(白蓮寺) 옛터이다.
만력(萬曆) 을해년에 창건하였으며 병자(1576년)년 봄에
증 영의정 문순공 퇴도선생을 봉안하였다.
묘는 6칸인데 이름은 존도사이며 신문 3칸, 신주 5칸,
당 15칸을 숭교당이라 한다.
동협실은 사성재, 서협실은 주경재인데 동재 4칸을 구인재, 서재 4칸을 명의재,
대문 1칸은 진학문이다. 그리고 동몽재 15칸, 유사방 5칸, 주사 10칸에 보상고 15칸이 있다.
서원의 이름은 백담 구봉령이 현액한 것을 정자 홍사제가 글씨를 썼다.
서애가 위패 봉안 제문(祭文)을 지었다.
<아아! 퇴계 선생의 道는 높고 德은 순전하여 청순한 기질로 혼자 천리를 터득하셨네.
정예한 학문은 오묘하게 전현과 계합되고, 참된 앎을 역천하여
징분질욕하고 개과천선하며 만가지 이치를 모아
하나의 진리로 귀일시켰으며 바다에서 흐르는 것 같도다> 하였다.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전말
병호시비는 이 지방 유림들의 지난날에 있었던 수치라고
좀처럼 입밖에 내지 않으려고 하는 이야기다.
괜히 아픈 가슴을 건드릴가 두려우나 후세가 사실을 바로 알고
허구와 실을 판단하도록 하여
징전비후(懲前毖後)코자 여기에 기록을 남긴다.
[가] 병호시비란 도대체 무엇인가? <병호시비>란 말은 우선 자구부터 풀어보면
병(屛)은 병산서원이고, 호(虎)는 호계서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는 곧 병산과 호계의 싸움이란 뜻이다.
서원의 운영은 배향된 선현의 자손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고 그 지방 유림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병호시비를 과장해서 말하면 <병산서원>파와 <호계서원>파의 싸움이다.
그래서 영남지방 양반들이 두 패로 갈리어 대판 싸움으로 번진 것이
오늘날 <병호시비>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병산서원은 안동에서 서남쪽 60리 풍천면에 있고
호계서원은 북쪽 25리쯤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월곡면 도곡동이란 곳에 위치하였다.
지금의 병산서원에는 서애선생의 위패를 모셨고 호계서원은 강당만 남아 있는데
당시 사당에는 거유 이퇴계 선생을 주향으로 서애와 학봉을 종향하고 있었다 .
말하자면 병산서원은 서애의 단독주택이고, 호계서원은 공동주택이라 하겠다.
시비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 공동주택에서 비롯되었다.
호계서원은 당초에 영남유림들이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여산의 오노봉(五老峰) 기슭 아래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처음에는 <여강서원>이라 하였는데
창건후 100여 년 뒤 숙종2년(1676)에 왕으로부터 <호계서원 >이란 사액을 받았다.
이로써 명실공히 호계서원은 영남서원 중의 수선이 되었고 더구나 1620년
퇴계의 두 수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종사케 함으로 더욱 빛났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양 유현을 종사토록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양쪽 사이에
분쟁은 일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영남유림을 양분시켜 대판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
◉ 서애․학봉의 위차(位次) 분쟁 분쟁의 주 원인은 양 유현 중에 어느 분을 상위(上位)에 모시느냐?가 불씨였다.
김씨측은 서애보다가 4살 위인 학봉을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며
류씨측은 관직이 영의정에 오른 서애를 상위에 두어야 된다고
주장 함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그래서 양자는 당시 상주(尙州)에 사는 정경세에게 위차의 재정을 받기로 했다. 정경세(1563~1633)는 고명한 성리학자로 호를 우복(愚伏)이라 하며
서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했고 왕자의 사부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였다. 뿐만 아니라 영남학파의 최장노로 널리 존경받고 있던 사람이다.
우복은 재정에서 <두 선생의 연치차는 견수[연장자와 함께 갈 때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 간다는 뜻]에 미치지 않고 작위의 차는 절석에 있다>라 말하고 서애를 좌인 상위(上位)로
학봉을 우인 하위(下位)에 모시도록 했다. 그래서 김씨 측은 거역할 명분이 없자
일단 승복으로 첫번째 시비는 끝났다.
[나] 사현(四賢)을 종묘에 봉안 그런데 또 시비의 2차전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뒤의 일이다.
1805년 영남유림에서 서애와 학봉 그리고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 등 4현의 위패를
서울 종묘에 종사키 위해 청원을 하게 되었다.
문묘란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조선조때 최고의 사당으로
여기에는 공자를 비롯한 사성을 중심으로 십철및 송조의 6현
그리고 공자의 제자 70명, 조선과 중국의 위대한 유학자 111명을 배향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위패를 모시게 됨은 자손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이며 자랑이다 .
그런데 넷 명현의 자손들이 문묘종사 청원을 하기 위해 서울에 회동하여
소장의 기초를 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서열문제가 일어났다.
학봉파는 연령순으로 하자고 하고, 서애파는 여강서원에 모실 때 이미 정해진 대로
그 선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때 한강과 여헌측 사람들은 학봉파의 주장에 찬동해서 연령 순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억지 춘양격인 소장을 작성하여 국왕에게 제출했다 .
이유인 즉 정구와 장현광도 명유이긴 했으나 다같이 벼슬을 싫어하여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관계로 벼슬을 가볍게 보는 학봉파에 동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류씨측은 노발대발하였다. 이 결정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만약에 받아 드린다면 자기들이 의성 김씨보다 격이 낮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소장을 쓰지 못하고 그들은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서열이 전도되었음을 논하고 그 부당성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양쪽의 소장을 접수한 조정에서는 4명의 승무를 모조리 기각해 버렸다.
그러자 한강과 여헌의 자손들은 학봉과 서애 양가의 싸움통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사전에 교섭으로 내약까지 얻었던 승무가 무산되자 급기야는 자기들만이
별도승무를 상소키로 획책했다.
다음해 11월 한강과 여헌측 사람들은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도내유림에 통고장을 보냈다.
그러자 통문을 접수한 안동의 각서원은 격분하여 급거 호계서원에 회동 그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서애와 학봉파는 싸움을 일시 중단하고 힘을 함께 모아 규탄하는 통문을
도내 유림들에게 띄우기로 했는데 통문 작성과정에서 또다시 싸움은 분출 되고 말았다.
통문 작성은 학봉파의 유생으로 전주 류씨인 류회문이 하였다.
전주 류씨는 풍산 류씨와는 본관을 달리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성 김씨 총본산인 내앞과는 예로부터 혈연관계(외손)로 굳게 맺어진 사이다.
그래서인지 통문의 서술은 학봉, 서애, 한강, 여헌 순으로 되어 있었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하회의 류씨측과 의성 김씨측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회 풍산류씨들은 처음 통문이 작성된 것은 서애, 학봉 순이었는데 학봉파에서 밤중에 몰래
학봉, 서애로 살짝 고쳐 썼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찢어 버렸다.
그러나 학봉파에서는 처음엔 다만 4선생이라 썼지 서열은 나타 내지도 않았는데
모인 자리에서 중론이 아무래도 서열을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협의한 결과
학봉, 서애 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류씨측이 완성된 통문을 찢어 버린 사실은 확실하다.
이에 격분한 학봉파에서는 통문을 찢은 류형춘에게 문벌을 가했다.
<문벌>이란 선비 답지 않게 파렴치한 행위를 한 자에게 그 죄상을 열기하여
서원벽에 붙쳐두는 것으로써 동류의 선비가 문벌을 받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다.
이로써 하회의 류씨들은 호계서원과 절연을 선언, 싸움은 더욱 더 치열해졌다.
한편 하회 류씨들이 호재서원을 결별하자 서애, 학봉으로 서열을 지지하던 사림들도
모두가 절연을 선언하고 서애의 위패를 봉안해 둔 병산서원에 모여 매사를 의논했다.
그러자 학봉파는 호계서원을 독점하고 무엇이든 여기서 의논하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양파의 접전이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 또 큰 시비는 대산 이상정(李象靖/1710-1781)을
호계서원에 합사하는 문제였다.
이상정은 본관이 한산으로 고려 삼은중의 한 분인 목은 이색의 후예다.
영조 때 벼슬은 참의로 그쳤으나 학문이 뛰어나 근세에 보기 드문 대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외조부인 이재의 문하생으로 학봉파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영남지방에서는
그를 퇴계학파의 적통이라고 일컬어 대단하게 존경해 온 분이다.
그래서 호계서원에 합사 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1812년 호유의 주도로 예안향교에서 도회를 열고 이상정 합사가 결의되어
국왕의 추인을 얻기 위한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으나 병유의 강력한 반대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4년 뒤인 1816년에 호유측은 또다시 이를 주장했지만
역시 병유측의 반대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다] 대산유고(大山遺稿)의 출간분쟁 그뿐만 아니였다. 이씨 집안과 류씨 집안에서는 대산 이상정 선생의 유고
<퇴계서절요>의 출판을 싸고 격렬한 공방전이 있었다.
<퇴계서절요>는 이황의 언행록인데 문제가 되었던 점은 본고중에 언급된 서애의 각주에
풍원부원군을 <풍산부원군>으로 오기한 점과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용에는 각주 없이
이름만을 기재한 점이다.
이는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류씨측으로서는 위신에 관계되는 큰 문제이다.
분명히 틀린 것을 정정토록 요구 했음에도 이씨 측은 설사 오기가 있을지라도 선생[대산]의
수필본이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다고 거부하여 싸움만 치열했을 뿐 끝내 간행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감정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대산 합사의 논의가 있을 적마다
류씨들은 반대만 했던 것이다.
[라] 묘우(廟宇)내의 위패 이동설 분쟁 두 번째 대산 추향(追享)의 논의가 청성서원(靑城書院)에서 열였던 다음달 즉 1816년 12월
병유측에 한통의 투서가 날아왔다. 내용인즉 <호계서원 묘우내 위패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다. 병유측은 즉시 호계서원으로 달려가서 확인한 결과 중앙에 있어야 할 위패가
북벽밑으로 옳겨져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호유측은 <묘내의 위패는 원래 북벽에 안치 되어 있었던 것으로
수백년 한번도 움적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병유측이 억지로 주장하는 것은
대산의 추향을 방지하기 위한 트집이라고 역습했다.
이런 관계로 호유측은 선수를 써서 병유가 소집한 날보다 하루먼저 도회를 열어
공론으로 이를 격파하려고 그 뜻을 도내유림에 통지하였다.
도회는 병, 호 양측이 소집했기 때문에 1월 17일, 18일 이틀에 걸쳐 개최 하게 되었다.
이로써 병, 호 양측의 대표가 묘내에 들어가 검증을 했지만 이미 냉정을 잃은 당사자 사이에
객관적인 검증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서로의 감정이 부딪히고 심지어 원색발언까지
난무하여 일대 흔란이 야기되었다.
이처럼 위패를 <옮겼다> <안옮겼다>를 두고 신물나는 입씨름은 그칠 줄 몰랐다.
추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한다면 모르거니와 묘내에 있는 물건의
동과 부동의 문제인 바 차분히 검증해 보면 백일하에 들어날텐데 서로간에 이성을 잃고
목숨을 걸고라도 기어코 이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양반들의 고약한 습성인것
같다고 요즘 사람들은 개탄을 금치 못한다.
이는 공적인 기관에 제소하여 문제를 풀 수밖에 없었다.
병유측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고소를 했는데 소장에서 <호유가 부당하게 묘위를 멋대로
이동한 것을 논하고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이를 잡아 죽쳐서 범인을 찾아 엄벌에 처할 것과
위패를 원위치로 돌려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관찰사는 김경노란 분이었는데 그는 금석학자이며 서예가로 유명한
완당 김정희의 부친으로 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소장을 받은 관찰사는 <묘위를 멋대로 옳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즉각 원위치에 돌릴 것>
대수롭지 않는 일로 생각하고 간단히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
이에 놀란 호유측은 다수의 인원을 동원하여 서원주위를 지키는 한편 병유측이 낸 소장은
근거가 없는 엉터리라고 논한 소장을 관찰사에게 제출했는데 <관찰사가 직접 내원하여 묘내를
검증하여 이동의 진위를 판단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관찰사 김경노는 호유측의 소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몹시 당황하다가
병호측에 내린 재정을 급거 취소하고 사림간의 분쟁에 관은 개입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판정을 번복하고야 말았다.
이처럼 <병호시비>는 도내의 유림을 두편으로 갈라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성 이씨만은 중립을 지켰다고 하니 이는 서애와 학봉 모두가 퇴계의 제자였기 때문에
어느편도 들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병호시비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을 것만 같다. 어쨌거나 병호시비는 이 지방 유림사상 오점을 남긴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마] 조정(朝廷)에서도 해결 못해 이 싸움은 결국에 가서는 조정에까지 걱정거리가 되었으니 한가지만 더 말하고자 한다.
대산 추향의 움직임이 급기야는 나라안의 당쟁 때문인지 도내뿐만 아니라 도외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이때 힘을 입은 호유측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일거에 일을 매듭 짓고자 급히 도회를 열게 되었다.
이를 알아 차린 병유측은 주계서원에 회동하여 왕에게 상소할 것을 의결하고 묘위의 복원은 물론
대산의 추향까지 분쇄키로 하였다. 그에 소수는 병유의 김종규였다.
김종규는 1817년 9월 왕이 선왕에 성묘하려 행차하는 틈을 타서 가전상소를 함으로
예조를 통해 재정을 받았다.
재정 내용은 <경상도 관찰사 김경노를 파견하여 쌍방 유생을 회유시켜서
위판을 원상대로 돌려라>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호유는 예조가 상계할 때 단지 <이와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쌍방을 설유할 것>
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패까지 언급했음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급히 예조에게 문의하였다.
이때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회답이 내렸다.
<위판 관계는 왕에게 말씀드린 사실이 없는데 그와 같은 조항이 있다는 것은
전달자의 오전일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그 도중에 누군가의 농간이 틀림 없다>는 것이다.
즉 <위판을 원상태로 돌려라>하는 조항은 뒤에 가필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배광옥이라는 관리가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전투우란 말이 생각난다. 문자 그대로 병호시비는 진흙탕에서 소가 사투를 벌리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이상 이야기는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세월이 달라진 오늘에 와서는 <병호시비>란 말을 합부로 입에 담는 이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지난 날의 아픔을 깨끗하게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의 주역들은 호유(虎儒)고 병유(屛儒)고 남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시시비비는 시간 낭비다.
이젠 김, 류측의 사람들은 서로가 융화한 가운데 호계(虎溪)도 가고 병산(屛山)도 가고 향사출문을 내며
화기애애하게 살아가고 있다. 양반은 양반인가 보다. 제발 앞으론 이런 전철이 없기를 바란다.
오늘 안동뉴스에(2009.3.31) "병호시비" 종결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두 명문가의 후손들이 시비를 끝내고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호계서원"을 정비하기로했다니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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